brunch

매거진 아는 맛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날필 Oct 06. 2020

나의 스텐팬 정복기

더이상 스텐팬과 계란후라이를 나눠먹고 싶지 않다면 필독

본격 스텐팬 정복기를 시작하기 전에, 고백하고 가야할 것이 있다.

.

.

.

위 사진은 가장 최근에 내가 구운 갈치구이다.


갈치를 이따위로 구워놓고 스텐팬 정복기 따위를 끄적여도 되는 것인가.

걸레짝같은 갈치구이 앞에서 잠시 현타가 왔지만,

매일매일 '정복'에 가까워지고 있다고 혼자 정신승리해가며 <우격다짐 스텐팬 정복기>를 시작해 보겠다.




1. 팬 데우기

스텐팬 정복의 기본은 예열. 예열이란 쉽게 말해 팬을 충분히 데우는 것인데 본디 스텐팬이라는 게 적당히 데워서는 적당한 결과가 나오지 않는다. 처참한 실패작을 만들어내고 싶지 않다면 스텐팬 앞에서 충분한 인고의 시간을 가져야 한다. 스텐팬 입문기에는 이 기다림의 시간이 영겁처럼 느껴진다. 약불은 복장이 터지고 강불은 스텐팬이 터져나갈 수 있으므로 중불에서 충분히 예열하는 것을 권장한다.


"그래서 충분히가 정확하게 몇 분이냐?"라고 피해가고 싶은 질문이 돌아온다면 집집마다 화력이 다르고 화구가 다르고 팬의 두께도 다르므로 정확한 시간을 단언할 수는 없다고 애매하게 피해갈 수밖에대신, 스텐팬이 충분히 예열됐는지를 알아볼 수 있는 확실한 방법이 있다.

달궈진 스텐팬 위에서 물 묻은 손가락을 튕겨 물방울을 흩뿌렸을 때 물방울이 동그랗게 이슬을 맺히며 팬 위를 굴러다니면 예열완료. 이 때를 넘기지 않고 기름을 붓는다.


2. 기름 데우기

잘 달궈진 스텐팬에 기름을 두르고 기름이 데워지기를 기다린다.

이 때 기름에서 연기가 날 때까지 두어서는 곤란하다.

대관절 기름은 또 얼마나 데우느냐.


이렇게 팬 위에서 기름이 중간중간 섬처럼 패이거나(좌)

또는 기름이 팬 가장자리에서 아래와 같은 모양으로 강강술래를 하면(우) 기름 또한 잘 데워진 것이다.


3. 재료 표면의 물기&냉기를 충분히 제거한다.

충분히 달궈진 팬에, 적당히 달궈진 기름까지 갖췄다면 반은 성공이다. 나머지 반은 재료표면의 건조상태에 달렸다. 재료의 표면에 물기가 남아있으면 팬에 들러붙을 확률이 높다. 아무리 예열을 잘 해놔도 겉이 덜 마른 두부나 조기를 올려놨다가는 바삭한 껍질을 스텐팬에게 모조리 빼앗기게 된다.


생선이나 두부처럼 표면이 촉촉한 재료들은 가급적 재료를 미리 상온에 꺼내두어 냉기를 가시게 한 뒤 키친타올이나 자연건조로 물기를 충분히 제거해야 한다.(같은 이유로 계란후라이를 할 때에도, 계란을 미리 꺼내두는 것이 좋다.) 빠른 물기제거가 어렵다면 표면에 밀가루와 쌀가루같은 마른가루를 묻혀 굽는 것도 방법이다.


마지막으로 총정리.

1. 팬을 중불에서 충분히 예열
- 물방울이 팬 위에서 이슬처럼 맺혀 굴러다닐 때까지

2. 기름 또한 중불에서 예열 
- 기름이 팬 중간중간 패이거나 춤추듯 가장자리를 돌 때까지

3. 재료 표면의 냉기/물기 제거
- 물기 제거가 어려우면 마른가루 묻히기


위 세 가지 사항만 지켜주면 이렇게

숟가락만으로도 홀랑 뒤집히는 조기를 구워낼 수 있다.


정작 내가 오늘 구워낸 갈치는

걸레짝이었지만.


팬도 데우고 기름도 데우고 물기도 제거하고 심지어 밀가루까지 묻혔건만. 배고프다는 아이들의 성화에 마음이 급해져 한 면이 충분히 익기 전에 홀랑 뒤집은 것이 패인인 듯. 10년 가까이 스텐팬을 썼음에도 똥손 스텐팬유저는 종종 실패를 맛본다.


그럼에도 스텐팬을 쓰는 이유는 다음과 같다.

- 세척/관리가 쉽다.

- 반영구적으로 쓸 수 있다.

- 친환경소재로 화학물질로부터 안전하다.

- 스텐팬쓰는 여자라는 주부만렙 이미지를 얻을 수 있다.


이토록 수많은 장점에도 불구하고 스텐팬 유저가 현저히 적은 이유는 이 일련의 적응과정이 <정신건강에 몹시 해롭기 때문>일 것이다. 이 강력한 하나의 단점으로 인하여 스텐팬을 쓰지 않을 개인의 자유 역시 존중하는 바이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