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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로우 Dec 26. 2017

오늘은 여행을 합니다

한 달 살기 중 가장 기억에 남는 날



우리 부부는 만난 지 비교적 빠른 시간에 결혼을 했다. 첫눈에 반해 무섭도록 열정적인 사랑은 아니었지만, 투덜거리면서 서로 이해하는 방법을 일찍 배웠기 때문일까? 만남을 갖고 난 뒤 매우 이른 시간에 결혼이라는 단어가 이곳저곳에서 나오기 시작하더니, 결국 인생의 여행을 함께 하는 동반자 또는 동료 또는 반려자가 되었다. 때문에 친구 커플들이 여행을 수없이 다닐 때, 우리는 커플로서는 그런 설렘 가득한 경험을 거의 하지 못했다. 부부가 되어서 떠나는 것과, 연인일 때 떠나는 것에는 감정적으로나 감성적으로나 다소 차이가 있다. 묘하게 …




오늘은 여행을 합니다




제주 한 달 살기 10일 차, 도시에서 미리 입력해뒀던 알람 시간이 이제는 많이 익숙해졌다. 오히려 알람이 울리기 전에 눈을 먼저 뜨고, 스마트폰 알람을 미리 중지시킨다. 더 잘 것인가? 아니면 일어날 것인가? 그 짧은 순간에도 몇 번이나 고민한다. 오늘은 일어나기로 결심했다. 아내와 아이를 깨우는 것으로 복잡한 갈등을 정리해 보려 한다. 그렇다면 오늘은 뭘 할까? 일어나자마자 하는 고민은 항상 이 문제다. 모처럼 내가 의견을 제시해봤다. 오늘은 제주도 여행, 그 느낌으로 다녀보자고.


주도형 성격인 나와, 배려형 성격인 아내. 내 의견을 크게 반겨줬고, 아침 식사 후에 곧바로 외출 준비를 시작했다. 대충 얼굴만 씻고, 선크림만 바르면 끝난다. 이제 서로 화장이며, 비비크림이며 그런 것들은 필요 없기에 준비 시간을 많이 아낄 수 있다.


"나갈까?"

"근데 어디 갈 건데..."






방금 아침을 먹은 느낌인데, 또 점심시간이다. 제주도의 시간은 그렇다. 좁은 땅이라고 여겨졌지만 실제로 와서 살아보니깐 결코 좁지 않다. 20분 거리조차도 멀게 느껴지는 매우 신비로운(?) 섬이다. 집에서 비자림까지는 가까운 줄 알았으나, 차량으로 이동해도 40분 이상은 걸린 것을 보면 확실히 제주도는 느림의 미학이 있는 장소임이 분명하다.


비자림을 들어서기 앞서, 점심 식사를 해결하기로 했다.










오늘 점심은 아내(안나)가 좋아하는 돈가스다. 제주산 흑돼지를 활용한 돈가스로 도시에서는 만나기 힘든 귀한 음식이다. 한 달 동알 살면서 거의 집에서 모든 요리를 해서 먹었기에 이렇게 가끔 나와서 외식하는 것이 매우 반갑고 흥미로웠다.











내가 아내에게 비자림을 가자고 했던 이유는 몇 가지가 있다. 하나는 아내 또한 제주도를 수없이 방문했지만 비자림을 한 번도 찾지 않았다는 것이고, 하나는 서로 각자의 고민이 있기 때문에 숲 속에서 여유를 갖자는 것이었다. 아내의 고민은 제주에서의 한 달 뒤에 있는 회사 복직이었다. 복직을 하면 1년 동안의 공백을 잘 채울 수 있을까 하는 것이 가장 큰 고민이었다. 복직을 한 달 앞두고 내가 모를 걱정과 고민이 많았던 모양이다. 내 고민이야 뭐, 어떻게 밥 벌어먹고살지 - 무슨 일을 해야 할지에 대한 일상적이면서도 늘 깊은 생각에 빠지는 고민들 뿐이다.










좋은 답변들이 많았다. '아직 일어나지도 않은 일을 고민할 필요는 없다', '그런 일은 실제로 일어나지 않는다.', '좋은 생각만 하면 좋은 일이 생긴다.' 등 마치 자기 개발서나 재미있는 동화집에나 있을 법한 그런 뻔한 답변들로는 사실 이 세상이 그리 편하게 흘러가지 않는다. 때론 걱정에 따른 깊은 고민이 필요하고 때론 앞 날을 미리 생각해보는 일도 필요한 것 같다. 꿈꿔오는 이상적인 세상이 아님을 이제는 잘 알고 있기 때문은 아닐까? 그런 고민이 있을 때 찾는 곳이 바다 또는 산이다. 그리고 이번엔 숲이다.










여행은

내 즐거움을 찾기 위해 떠나기도 하지만 내 고민을 들여다보기 위해서도 떠난다. 오늘 여행은 그런 여행이다. 애초에 제주를 찾았던 이유도 삶의 이유도 즐거움보다는 미래의 계획과 고민의 공유를 풀기 위해서였으니, 오늘처럼 사색적이면서 조용한 여행도 그리 나쁘지 않다.










본래 비자나무는 매우 넓은 형태로 이 일대를 감싸고 있었다. 지금은 그 규모가 매우 줄어들어 비자림이라는 이름으로 작은 숲을 형성하고 있지만 옛날이었다면 길을 잃어버릴 정도의 미로였을 것이다. 비자림에는 아직 숨을 잘 쉬고 있는 비자나무에 숫자를 붙여놓고 예쁘게 가꿔나가고 있는 중이다. 사계절 내내 그 아름다움을 감상할 수 있고, 특히 눈이 가득 내리는 겨울에 찾아가면 그 풍경이 굉장하다. 아 - 비가 와도 좋다.










그리고 걷기 좋다.










상쾌하면서도 기분 좋았던 두 시간. 비자림을 천천히 한 바퀴 도는데 걸리는 시간이다. 저마다 다른 사연으로 이곳을 찾겠지만 출구에 도착하면 모두 비슷한 생각을 할 것이다. 칠판의 녹색을 보는 것과는 매우 다르다.











연애를 할 때는 우리도 카페를 그렇게 많이 찾았다. 다른 이들과 비슷하다. 카페와 극장 그리고 식당, 이 세 가지는 연애의 3대 요소로 어딜 가나 빠지지 않는다. 어떤 취미를 공유하고 함께 했다면 매우 좋았겠지만 우리 부부도 그저 평범한 커플이었고, 서로 뭘 좋아하는지 잘 몰랐던 시기였다.


결혼 후 달라진 점이 하나 있다면, 카페나 찻집을 자주 가지 않는다는 것. 그 자리에 육아라는 새로운 일이 생겨버렸다. 이제는 찻집에 가는 것 자체가 소원을 이룬 것처럼 좋아해야 되는 상황이 돼버렸다. 메뉴를 선택할 때의 그 고민은 설렘으로 변했다. 자주 갈 수 있는 장소가 아니기에 신중함에 신중함을 더해본다.


.


비자림을 다녀온 뒤 잠시 집에서 쉬고 있었다. 아기를 데리고 다닌다는 것은 많은 에너지를 소비한다는 것이기 때문에 잘 쉬는 것이 중요했다. 다행히 우리는 제주도에 집이 있고, 주변에는 우리가 쉴 때 방해되는 것이 없었다. 가까운 곳에 무인카페로 운영 중인 <김영갑 갤러리 두모악>이 있어서 가끔 방문하기도 했다. 사람이 없을 만한 시간에 찾아가면 우리만의 공간으로 채울 수 있었다. 그게 바로 치유시간이었다.










오늘 여행이 좋았다. 날씨도 좋았고, 보이는 풍경도 좋았다. 맛있는 요리를 함께 먹었고 충분히 쉴 수 있는 시간도 있었다. 제주의 빛을 느끼기에 충분했다.










집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표선리 바다가 있다. 오늘 여행은 여기에서 마무리를 해보련다. 내려앉는 태양을 바라보면서 아내의 손을 꼭 쥐어잡아본다.





-

비자림에서

"근데 왜 지금까지 비자림을 안 왔던 거야?
"이런 곳이 있는 줄도 몰랐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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