엔딩 크레딧이 올라가는 동안, 온몸이 아리게 슬펐다. 13년 전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아무도 모른다>를 본 이후, 두 번째 작품으로 <괴물>을 보았다. 두 작품 간의 시간 차이 20년 동안, 찬란하게 벼려진 감독의 시선은 신이 사람을 바라보는 것 같다. 압도적으로 아름답고 슬프다.
단순한 이지메 이야기로 시작한 영화는, 켜켜이 레이어를 쌓아 올리며 ‘괴물은 누구인가’ 질문을 던진다. 영화가 진행되는 동안 나는 모든 등장인물의 시점을 살아본다. 종국에는 나도 괴물일지 모른다, 는 탄식이 흘러나온다.
미나토와 요리, 두 소년의 시점. 이 아이들은 다시 태어나고 싶어 한다. 우주가 팽창해 모든 것이 인간은 원숭이가 되고, 공룡이 돌아와 모든 것이 거꾸로 돌아가기를 기다린다. ‘빅 크런치’는 아버지의 죽음, 엄마와의 이별로 생의 비가역성을 온몸으로 버티지만 이해할 수는 없는 아이들의 소망이다. 미나토와 요리는 빅 크런치가 오면 다시 태어날 수 있다고 믿으며 버려진 열차 안에서 그때를 기다린다. 다시 태어나고 싶다는 순수하고 무지한 소망을 품는 어린 시절이 있다. 삶이 주는 거절과 좌절을 탓할 곳을 찾지 못해 나 스스로를 리셋하고 싶지만, 다시 태어남은 필연적으로 죽음을 수반한다는 걸 어렴풋이 알게 될 때 말이다.
호리 선생. 이 영화에서 가장 자연스러운 사람이다. 선생님이지만 어딘가 허술하고 농담을 좋아하고, 쉽게 상처받고 좌절하는 연약한 인간. 희로애락을 느끼며 자연스럽게 살아가는 사람이 호리 선생이다. 모든 것이 부자연스러운 학교에서 호리 선생의 자연스러움은 심판의 대상이 된다. <괴물> 속 인물들이 사는 곳은 폐쇄적인 소도시다. 그런 곳에서 어떤 판단은 만들어지는 순간 비가역적이고, 별개의 생명을 가진 존재가 된다. 판단으로 만들어진 호리 선생은 잔인하게 심판받는다. 그럼에도 끝까지 자연스러운 호리 선생은 이 영화 속에서 유일하게 사과할 줄 아는 어른이다. 사람은 누구나 인간적인 과오를 저지르지만, 그것으로 한 사람이 ‘괴물’이 되는 건 아니다. 타인의 괴물에 대해 판단하고 심판하는 순간 괴물이 생겨난다. 호리 선생은 ‘미안해.’라는 말로 자신이 만든 괴물을 없앤다. 타인을 엄정하게 판단하고 나서, 그 판단을 내린 나 자체가 괴물이었단 걸 깨닫는 순간들이 있다. 그 순간에 ‘미안해’라고 말할 수 있는 인간은 얼마나 사랑스러운가.
반면, 부자연스러운 사람들. 미나토의 엄마, 사오리. 미나토를 지키려는 사오리의 마음은 괴물에게 생명력을 불어넣는다. 미나토의 교장선생님. 손녀의 죽음은 끊어진 톳줄처럼 그녀의 삶을 샅샅이 찢어발긴다. 그녀에게 삶은 괴물이 된다. ‘누구나 가질 수 없다면, 그건 행복이 아니란다.’라고 말하며 관악기를 부는 교장의 모습은, 삶의 비가역성에 빅크런치라는 희망을 갖는 아이들과 대조적으로 버석한 절망 그 자체다. 그 어떠한 희망도 없을 때, 삶은 괴물이 된다. 미나토의 엄마와 교장은 자꾸만 괴물을 키우고 돌보는 사람이 된다.
괴물은, 누구인가. 인간의 마음이란 게 있는가.
카메라의 시선은 판단하지 않는 눈으로 나를 이리저리로 데려간다. 그러하여 영화의 말미 사카모토 류이치의 ‘aqua’가 흘러나오며 미나토와 유리가 티 없이 웃으며 달리는 장면에서, ‘아, 어쩌면 신은 우리를 이렇게 바라볼지 몰라’라는 생각이 든다. 태풍이 지나가고 뒤집어진 기차에서 나오는 미나토와 유리는 ‘우리 다시 태어난 걸까?’ ‘아니.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어’라고 말한다. 그런데도, 둘은 행복해 보인다. 둘은 삶의 돌이킬 수 없음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사랑하고 실수하고, 넘치며 모자라게 살아가는 인간이 될 것이다. 다시 태어날 수 없어도 좋다. 신은 인간을 판단하지 않는다. 나약함, 부족함, 치졸함, 어리석음으로 크고 작은 과오를 반복하는 인간을 있는 그대로 바라본다. 어떠한 모습이어서 사랑하는 게 아니라, 인간의 모든 면을 사랑하는 것, 그것이 신의 마음이자 인간의 마음.
<괴물> 속 인물들의 인생은 아주 작은 틈에 걸려 괴물을 탄생시킨다. 잠시 넘어진 틈에 비가역적인 것을 돌이키고 싶은 마음이 괴물을 낳는다. 그 마음은 타인을 제단하고 판단한다. 일생동안 단 한 번 밖에 살지 못하며 타인의 편린 밖에 볼 수 없다는 사실이 늘 괴로웠다. 삶은 왜 한 방향으로 흐르고 우리는 서로의 단면 밖에 볼 수 없는지. <괴물>을 통해 2시간 동안 신의 눈으로 삶의 일방향성을 바라보며, 어쩐지 이젠 그 사실이 괴롭지 않다. 사랑하고 잘못하고 넘어지고 일어서는 그저 자연스러운 인간으로 사는 것이 전부이구나.
폭풍우 속 사오리와 호리 선생이 유리창을 아무리 닦아도, 금세 흙탕물이 고여 반대편을 볼 수 없다. ‘나는 한쪽 면 밖에 보지 못한다’는 걸 알며 살아가는 일이 인간의 마음으로 사는 길 아닐까.
영화는 내내 아름답다. 그 아름다움은 매끈하고 가공된 것이 아니다. 산산조각 난 유리도 눈이 부시게 아름다운 것처럼, 부족하고 잘못이 있는 타인의 삶의 편린이라도 아름답다는 걸 보여준다. 온전하지 않아도 아름답다. 사카모토 류이치의 음악과 함께 찬란하게 아름다운 영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