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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로우 Jan 05. 2024

찻잔을 비우며, 숨 쉬기

주말 아침마다 이화 선생님과 마주하고 찻잔을 비운다. 어느덧 2년째. 이화 선생님의 방은 계절의 해상도가 높다. 봄의 찬란함, 여름의 빛, 가을의 은은함, 겨울의 단정함이 창 너머로 선명하다. 처음 그 방에서 차를 마시며 선생님과 대화를 나눌 땐 차를 마시는 일이 참 어색했다. 마시면 머릿속의 전구가 반짝 켜지는 고양감을 주는 커피와 달리, 차는 따끈함 정도의 감흥 밖에 주지 않았다.


계절이 변하듯 내가 보내는 나날도 매번 달랐다. 어떤 날은 찬란하고, 어떤 날은 비참했다. 찬란함을 음미하고 비참함을 다독일 여유 없이, 커피를 마신 나는 늘 2배속이었다. 2배속의 내가 선생님을 만나러 간다. 선생님은 찻잎을 넣고, 물을 따르고, 천천히 우러난 차를 내어 주신다. 더운 김이 피어오른다. 차를 한 모금씩 마시며 나는 1.5배속, 1배속, 어느덧 0.5배속까지 고요해진다.


선생님과 찻잔을 비우며 이완의 감각을 깨운다. 무기력도, 관망도 아닌 자연스러운 이완. 더운 차가 몸속으로 흘러들어 가며 찬란함도 비참함도 흘려보낼 수 있는 감각을 깨운다. 찻잔을 비우며 내가 비워 낸 건, ‘반드시, 절대’라는 말. 생이 반드시 찬란해야 해, 생이 절대 불행해서는 안돼,라는 나의 목소리.


찻잔을 비워내며, 숨을 채운다 뱉는다. 어디로 가거나, 무엇이 되어야 해서 숨을 쉬는 게 아니라 그냥 나로서 숨을 쉰다. 태어나 처음으로 스스로 호흡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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