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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라즈 Aug 09. 2020

미국 박사 유학 와서 여태 뭐 했니?

박사과정 3년 차 결산



박사과정 4년 차 시작을 앞두고 있는 지금, 이제까지 미국에 유학 와서 해왔던 일을 쭉 적어보려고 한다. 개인적으로는 이제까지의 미국에서의 삶을 되돌아보며 중간 점검을 해보려는 목적이다. 

그렇지만 박사과정을 준비하는 사람에게는 유학 생활을 가늠해볼 수 있는 어떤 이야기가 될지도 모르겠다. 


1년 차 


내 전공은 1년 차 코스웍 과정이 가장 많은 힘이 들어간다. 가장 기본적이고 중요한 걸 배우는 단계여서 리서치보다는 해당 교과목 내용을 완전히 숙지하고 퀄 시험을 통과하기 위해 전력을 다해야 한다. 반드시 모든 내용을 완벽하게 숙지해야만 퀄을 통과할 수 있다. 게다가 내 전공은 원체 퀄 탈락률이 꽤 높은 편이다. 내 학교에서는 적어도 3명, 많게는 절반 넘게 탈락하기 때문에 심적으로 부담이 될 수밖에 없었다. 


1학년 때엔 주로 수업 들으면서 필기하고 달달 외우고, 이해하고 암기하고 계산하고 과제하는 데에 시간을 보냈다. 집-학교-도서관, 정말 고3 때보다 더 바쁘게 공부하며 살았던 것 같다. 미국 생활과 혼자 사는 삶에 적응할 것도 없이 진도를 따라가고 이해하기도 벅찼다. 차가 없었지만, 차가 있었어도 너무 바빠서 어디 갈 수가 없었다. 


수업은 토론식이 아니라, 그냥 한국처럼 교수가 수업하고 학생들이 받아 적고 문제 푸는 형식이었다. 때문에 언어가 크게 문제가 되진 않았다. 사실 영어보다 퀄 합격이 더 급해서 생각할 겨를도 없었다. 


나는 학부 시절에도 전공성적만큼은 항상 성적이 높았고, 내용을 습득하는 데에 크게 어려움을 겪지 않았기 때문에 내 전공이 적성에 잘 맞다고 생각해왔다. 석사에서도 성과가 좋은 편이었고 꽤 어려운 과제도 잘 풀어냈기 때문에 박사 과정에서도 적어도 내용을 이해하는데 어려움을 겪으리라고는 생각을 못했다. 


그런데 직장생활을 몇 년 하면서 공부를 쉬다가 갑자기 엄청난 과제량을 영어로 맞이하니, 그것도 박사 과정의 수준으로 깊게 파고드니까 정말 따라가기 벅찼다. 심지어 중간고사에서 꼴찌를 한 적도 있는데 솔직히 살면서 달리기가 아닌 분야에서 꼴찌를 한 건 처음이어서 적잖이 충격을 받았다. 물론 기를 쓰고 공부해서 기말고사로 성적을 만회했지만, 이때 받은 충격은 꽤 컸다. 내가 퀄을 탈락할 수도 있다는 불안감이 엄습했다.


1년 차 과정을 마치고, 무더운 여름이 시작되자마자 바로 논문 자격을 확인하는 퀄 시험을 보았다. 두 과목 중 한 과목은 합격했는데 한 과목은 탈락해서 재시험을 보게 되었다. 방학 내내 남은 한 과목에만 매달린 덕분에 다행히 재시험은 합격할 수 있었다. 합격을 했으니 하는 말이지만, 방학 동안 진도에 떠밀리지 않고 찬찬히 한 과목만 집중적으로 내용을 복습하는 동안 깊이 있게 이해할 수 있어서 나중에는 꽤 도움이 되었다. 물론 방학 내내 퀄 떨어진 후에 귀국하는 상상을 하느라 불안해서 잠도 제대로 못 잤지만 말이다. 


최종 합격을 확인한 후, 박사 과정을 이어갈 수 있다는 사실에 안도를 할 겨를도 없이 바로 2학년이 시작되었다. 



2년 차


2년 차 코스웍은 기초 이론 지식을 습득한 상태에서 자신의 적성이나 취향에 따라 세부 필드 과목을 선택해 듣는 과정으로 이루어져 있다. 하지만 호기롭게 3과목을 수강 신청한 나는 한 학기 내내 울게 되었다. 과제량이 장난이 아니었던 것. 이번엔 엄청난 양의 논문 리딩과, 글쓰기와, 발표와, 토론을 맞닥드렸다. 물론 모두 영어로 진행되었다. 


이때부터 언어의 한계를 제대로 느끼게 되었다. 물론 인터내셔널 학생이 많은 학과이고, 교수들도 그 사실을 이미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언어를 못하는 것 자체가 큰 문제가 되지는 않았다. 하지만 나 스스로에게 굉장히 좌절하게 되는 일이 많았다. 


분명 알고 있는 걸 말하지 못하기도 하고, 알고 있는 내용을 글로 쓰는데도 굉장히 오랜 시간이 걸렸다. 논문 리딩도 미국인이나 영어에 능숙한 사람보다 훨씬 오래 걸렸다. 한국인이라면 영어 리딩은 잘하지 않나 싶지만 논문을 읽는 것은 또 달랐다. 읽어야 할 논문은 쌓여있는데 시간만 흘러가는 상황이 매일 반복되었다. 나는 매일 좌절했다. 


언어는 아무리 시간을 많이 투자하고 노력해도 실력이 빠르게 늘지는 않는 영역이었다. 물론 미국에 온 지 1년밖에 되지 않았으니 당연한 일이었지만, 수업에서 요구하는 수준은 훨씬 더 높았다. 이를테면 나 스스로가 언어에 갇힌 듯했다. 한국에서 공부했으면 벌써 과제 끝내고 추가 공부까지 했을 텐데, 여기서는 시키는 과제도 제대로 소화하지 못하니 열등생이 된 것만 같아 항상 괴로웠다.


그래서 나는 자진해서 영어 과목을 덤으로 수강하게 되었다. (물론 나중에 티칭을 하기 위해서는 의무로 부과되는 영어 시험을 봤더니 해당 과목 수강 대상자로 뜨긴 했다.) 영어 과목을 추가로 수강한다고 등록금을 더 내야 하진 않았기 때문에, 나는 미국에서 영어를 배울 수 있는 기회를 이용하려고 최대한 많은 영어 과목을 수강했다. 다행히 이 수업들은 대단히 도움이 되어서, 영어 실력이 조금이나마 늘었다. 


TA 업무도, 이전까지는 채점 위주로만 하다가 2년 차 봄 학기부터 처음으로 학부 기초과목의 랩 티칭(일종의 문제풀이 수업)을 맡게 되었다. 그런데 어린 미국 학부 학생들 앞에서 영어로 말을 하려니 너무 긴장되고 떨렸다. 남 앞에 서서 말하는 것도 떨리고, 강의 내용을 가르치는 것도 떨리는데, 심지어 영어로 말하려니 머리가 터질 것 같았다. 한 학기 내내 강의실 들어가기 직전, 화장실에 들러서 한국말로 허공에다 욕을 잔뜩 하고 들어갔다. (그러면 긴장이 좀 풀렸다.)


물론 강의 슬라이드에 맞춰서 스크립트를 만들고 외워서 연습도 많이 해서 학생들 앞에 섰지만, 수업을 할 때마다 떨렸다. 심지어 강의 첫날, 건물 전체가 정전되는 바람에 준비해 간 슬라이드를 쓰지도 못하고 임기응변으로 넘겨야 했다. 다행히 1학년 기초과목이었기 때문에 대부분의 학생들은 착했다. 외국인 강사인 나를 많이 이해해주고 수업 중에 도움도 주었다. 나름대로는 언어의 한계를 극복하려고 학생들에게 많은 자료를 제공하려고 했는데, 괜찮았을지 모르겠다. 


이런 와중에도, 다행히 2년 차 과정이 끝날 무렵 지도 교수님을 만나고 연구 필드를 정할 수 있었다. 1학년 때 내가 조교를 했던 교수님이었는데, 그 교수님 수업을 2학년 때도 수강하면서 좋은 인상을 남겼던 모양이었다. 교수님이 먼저 나에게 연구 프로젝트를 제안했다. 나도 꽤 관심이 있었던 분야여서 2학년을 마치고 방학이 되자마자 곧바로 연구를 시작할 수 있었다. 


하지만 방학이 되자, 또 다른 문제가 닥쳐왔다. 나는 수중에 남은 돈이 없다는 걸 깨달았다. 1학년 방학은 퀄 재시험을 준비하느라 여념이 없었고, 이전에 모아둔 돈을 까먹으면서 어찌어찌 지냈었다. 하지만 이제 더 이상 남은 돈이 없었다. 재정이 넉넉한 학과가 아니라 Stipend는 항상 부족했고, 또 펀딩에 포함되지 않는 학교 등록비가 한 학기에 150만 원가량 되기 때문에 이를 지불하느라 모아둔 돈을 야금야금 까먹고 있었던 것이다. 게다가 봄에 차를 구입한 터라 지출이 엄청나게 늘어났다. 


나는 고민을 하다가 지도교수에게 일을 좀 부탁해서 운 좋게도 약간의 RA 일을 구할 수 있었다. 물론 이걸로도 석 달의 긴 방학 동안 렌트를 내면서 생활비를 충당하기엔 충분하지 않아서 모부님께 약간의 용돈도 받아야 했다. 일단 카드 빚을 늘려가면서 학기가 시작되고 다시 월급을 받기를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3년 차


사실 유학 온 후로 심적으로 가장 힘들었던 시기가 3년 차 가을 학기였던 것 같다. 


일단 Independent instructor로 두 수업을 배당받게 되었는데, 나는 처음으로 대학 강의를 단독으로 진행하는 것에 대단한 부담감을 느꼈다. 게다가 랩 티칭은 어디까지나 조교이기 때문에 학생들의 성적이 내 손에 달려있진 않은데, 이번엔 수업의 A부터 Z까지 내가 모두 계획해야 했다. 심지어 월급은 채점 조교와 같은 데다가, 나는 교수가 되거나 학계로 갈 생각은 접었기 때문에 수업하기 정말 싫었다. 하지만 내가 하기 싫다고 피할 수 있는 일은 아니었다. 


수업 자료를 준비하고, 강의 내용을 생각해서 연습하고 교단에 서서 영어로 설명하고, 과제를 내주고 채점을 하고 시험 문제를 만들고, 그 사이에 밀려드는 학생들의 모든 사연을 들어주고 나면 진이 빠졌다. 대부분의 학생들은 착하지만 가끔 진상이 한 두 명씩 있어서 골머리를 앓았다. 아시안 젊은 여자가 서투른 영어로 수업을 하니 그 점을 이용해서 나를 무시하는 태도를 보였던 것이다. 이럴 때마다 심적으로도 지쳐갔다. 그 수업은 마지막까지 나를 애를 먹여서 학기 말에 성적을 주는 문제로 학과 코디네이터와 학생과 삼자대면까지 해야 했다. 


게다가 나름대로 일찍 시작한 리서치도 계속 난항을 겪었다. 일단 석사 때의 세부전공과, 회사 다니면서 했던 전공과는 완전히 다른 분야기 때문에 처음부터 공부해야 할 것들이 많았다. 이제까지 늘 조교를 하거나 남의 연구 서포트만 했기 때문에 스스로 진행하는 리서치에 대한 요령도 없었다. 늘 교수의 요구 수준에 미치지 못한다는 부담감도 있었다. 그리고 티칭의 부담이 너무 커서 리서치에 시간을 내서 제대로 집중하기 어려웠다. 발 빠른 동기들이 하나 둘 성과를 내어 발표를 하는 걸 보고 굉장히 초조해졌다. 


이 와중에 가을 무렵, 가택침입 사건이 일어났다. 실수로 현관문을 열어놓고 잔 것인지, 새벽에 마약에 취한 젊은 남자가 거실까지 들어와서는 우리 집에서 자겠다고 난동을 부린 것이다. 다행히 위험한 일 없이 경찰을 불러 해결이 되긴 했지만, 그 후로 매일 밤마다 불안에 떨다가 결국 카운슬링을 시작하게 되었다. 등록금에 포함되어 있는 학생 서비스였기 때문에 다행히 경제적인 부담은 없었다.


가택침입에 대한 트라우마로 시작된 카운슬링에서 결국 보편적이고 근원적인 불안감의 원인인 대학원 생활과, 리서치, 티칭의 어려움, 외국 생활의 어려움에 대해서 이야기하게 되었다. 상담가와의 오랜 논의 끝에 나는 박사 과정에 진학하기 전에 끊었던 항우울제 복용을 다시 시작하기로 결정했다. 우울증은 둘째 치고, 3학년 무렵부터 불안감이 너무 심해져서 일에 집중을 할 수 없었던 것이다. 


사실 내 기질 상, 박사 과정 중에 한 번은 우울증이 올 것이라고 예상했었다. 박사 과정 자체가 멀쩡한 사람도 우울증을 오게 만드는 시스템이기도 한데 나라고 잘 넘어갈 수 있을까. 그리고 경미한 수준일 때 미리 약을 먹으면서 적당히 관리해야 한다는 걸, 나는 과거의 경험으로 알고 있었다. 


다행히 3학년 봄학기에는 운 좋게도 RA를 배정받아서 티칭을 피해 갈 수 있었다. 지도교수의 RA였기 때문에 아무 일도 하지 않았다. 대신 코스웍을 완전히 끝내기 위해서 남은 과목을 수강해야 했는데 다행히 크게 부담되지 않는 과목이었다. 


그리고 2학년 겨울방학 때 잠깐 하면 될 거라고 생각했던 아르바이트가 생각보다 잘 풀리면서 부업으로 불러도 될 정도로 꽤 수입이 들어왔다. (한국에서 버는 돈이기 때문에 미국 학생 비자와는 상관없다.) 보릿고개 방학을 잘 버틸 수 있는 정도였던 데다가, 성과를 인정받아 다음 일도 추가적으로 들어왔다. 3년 차에 들어서면서 아버지께서 은퇴하셔서 더 이상 모부님께 금전적으로 기댈 수 없다는 점에 대해 항상 부담이 있었는데, 부수입이 생기니 걱정을 한시름 덜 수 있게 되었다. 물론 시간적으로 여유가 없긴 하지만, 사실 리서치를 주 7일간 할 수 없기 때문에 남들이 쉬는 동안 간간히 하면 되는 종류의 일이었고, 일과 학교생활을 병행하며 바쁘게 보내니 오히려 능률도 올라갔다.


이렇게 현실적인 어려움이 해결되자, 이 무렵부터 나는 리서치에 좀 더 집중할 수 있었다. 리서치에 요령도 생겨 교수와도 매주 미팅을 하면서 차근차근 리서치를 진행시켜갔다. 결과가 빠르게 나오진 않지만 내 연구와 분야에 자신감도 생기게 되었다. 


문제는 이때 코로나 19가 터졌다는 것이다. 미국 분위기가 뒤숭숭해지고, 귀국길도 막히고 불안감도 엄습해왔다. 모든 수업이 학기 중에 온라인으로 바뀌면서 나뿐만 아니라 모두 혼란을 겪었다. 하루 종일 집에만 있게 되니 처음엔 적응이 되지 않아 무척 힘들었다. 하지만 적응되고 나니 오히려 더 편해졌다. 이 기간 동안 모든 약속이 취소되고 여러 잡무에서도 벗어나니, 오히려 생활패턴이 규칙적으로 잡혀서 리서치에 집중할 수 있는 시간이 늘어났다. 그래서 방학 내내 절간에서 지내듯이 규칙적으로 침대에서 책상으로 출근하고, 다시 침대로 퇴근하는 일을 반복했다.



4년 차를 앞두고 


나는 이 상태로 이제 4년 차를 맞이하고 있다. 사실 내가 박사 생활을 잘하고 있는지에 대해선 자신이 없다. 일단 그냥 '하고 있다'. 우울증으로 자살하지 않았으니 생활 자체는 그럭저럭 해나가는 것 같은데, 박사생의 본업인 리서치를 잘하고 있다고 말하기에 무리가 있다. 물론 연구과정 1년을 겪은 지금, 뒤늦게 리서치에 적응해서 흥미도 슬슬 느껴가고 있지만, 남들은 이미 더 잘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실 개인적으로는 리서치가 늦어져도 상관은 없다고 생각하지만, 장학금은 상관이 있기 때문에 문제가 된다. 마음이 급해져서 어서 성과를 내고 싶은데, 다른 공부와 달리 리서치는 마음먹은 대로 결과가 나오지 않는다. 내 공부가 부족한 탓인지, 노력이 부족한 건지, 실력이 부족한 건지, 연구 주제가 너무 어려운 탓인지 가늠이 되지 않는다. 수업을 듣는 일은 정답이 있고, 평가가 바로 매겨지는데, 리서치는 완전히 다른 종류의 일이다. 이를테면 망망대해를 무작정 항해하는 기분. 목적지가 언제쯤 나올지 도무지 알 수 없고 방향이 맞는지도 알 수없다. 지도 교수가 이끌어주긴 하지만, 결국 나 자신이 방향키를 잡고 직접 항해를 해나가야 하기 때문에 두려움도 있고 부담감도 크다. 


과연 내가 4년 차에는 뭐라도 성과를 내서 좋은 연구자로 거듭날 수 있을지 모르겠다. 남들은 인턴도 한다는데 나는 그런 것도 할 수 있을지, CV에 뭐라도 올려서 잡마켓에 제대로 나갈 수나 있을지, 프릴림은 제대로 통과할 수 있을지. 이런 것들을 생각하면 잠도 제대로 안 와서 생각을 안 하려고 하지만 생각이 자꾸 난다. 


내년엔 이 브런치에 더 희망적인 글을 쓸 수 있게 되었으면 좋겠다.





다음 글은 여기에

https://brunch.co.kr/@raxustory/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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