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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라즈 Jan 06. 2025

인간 키세스가 되다

그리고 추위 죽겠는데도 내가 자꾸 집회에 가는 이유

 민중의 소리 트위터 영상 속에서 발견한 나???!!! 

이 영상에 찍히게 된 사연을 소개해 보겠음.




내란 수괴의 체포를 촉구하는 민주노총과 비상행동의 한남동 철야 시위가 이틀 째였다. 나는 몸 상태가 썩 좋지 않았기 때문에 철야 시위에 참여하는 것은 무리라고 판단했다. 그렇지만 집이 있는 경기 남부에서 한남동까지 바로 가는 광역버스가 있는데, 그리고 한남동에 들렀다가 갈 시간도 충분한데 집회를 아예 모르는 척할 수도 없었다. 나는 집에서 잠을 짧게 자고, 동이 터오기 전에 일어나 첫 차를 타고 한남동으로 향했다. 


비상계엄령 이후 대통령 탄핵안이 가결되기 전 2차 계엄의 위험이 있던 어느 밤, 나는 국회 앞에서 밤을 지새운 적이 있었다. 새벽 5시는 밤새도록 추위와 잠과 버티던 사람들이 하나둘씩 귀가하기 시작하는 시간이다. 그렇지만 다시 인파가 몰리려면 해가 뜨고 난 후에야 사람들이 찾아온다. 이번에도 동트기 전 새벽이 가장 위험할 것 같았다. 어차피 오래 있을 수 없다면, 차라리 사람이 가장 적은 시간대에라도 머릿수를 보태자는 생각이었다. 


새벽의 한남동은 낮과 다를 바가 없이 시위의 열기로 가득 차 있었다. 많은 사람들이 담요와 패딩을 둘러쓰고 추위와 싸우고 있었다. 나는 집에서 잘 자고 나온 것에 다소 죄책감을 느끼며, 새벽 시간에라도 힘을 보태야겠다고 생각했다. 내가 대단한 걸 할 수 있는 건 아니지만, 머릿수 하나는 보탤 수 있었다. 그리고 많은 머릿수가 하나씩 보태어지면 그것이 힘이 된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이번에도 귀찮음과 편안함을 무릅쓰고 추운 새벽에 거리를 나선 것이다. 


시위 진영의 앞쪽에 자리를 잡았다. 아마 앞쪽에 자리 잡았던 사람들 중 이미 밤을 꼴딱 새운 후에 집으로 돌아간 사람들이 비워둔 자리였을 것이다. 나는 내가 그 사람들의 빈자리를 대신할 수 있다는 생각에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여러 번의 집회 동안 경험이 쌓여서 미리 가져왔던 방석을 꺼내 차가운 아스팔트 위에 깔고 그 위에 앉은 후에 핫팩을 꺼내 데우기 시작했다. 


해뜨기 직전이 가장 힘들다더니, 새벽은 너무 춥고 어두웠다. 싸락눈이 내리다 말다 했다. 나는 시민 자유 발언을 들으며, 구호를 외치고, 사이사이에 흘러나오는 음악에 몸을 흔들면서 추위를 잊으려고 했다. 그저 앉아있는 것이 전부인데도 꽤 힘들었다. 하지만 방금 전에 와서 잠이 덜 깬 나보다는 시위대 사이를 돌아다니며 물건을 나눠주는 자원 봉사자 분과 밤을 꼬박 지새우고도 계속 자리에 앉아있는 사람들이 더 힘들 터였다. 


은박 담요를 뒤집어쓰고 철야 시위 중인 시민들 (직접 촬영)


주변 사람들은 밤새도록 두툼한 패딩 위로 은박 담요를 둘러싸고 추위를 버텼다. 그 모습이 뒤에서 보면 마치 초콜릿 키세스 포장지 같았다. 나 역시 지나가던 자원 봉사자 분들로부터 은박 담요를 받아 주변 사람들처럼 몸을 감쌀 수 있었다. 얇은 은박지를 펼쳐서 두르자 몸이 제법 따듯해졌다. 그걸 둘러싼 내 모습이 어떤지는 볼 수 없었지만 주변을 둘러보며 아마 저 키세스 형태 중 하나일 거라고 막연히 생각했다. 그리고 누군가가 멀리서 보내줬을 맥mo닝을 먹고 힘을 냈다. 첫 차를 타고 나오느라 아침 식사를 하지 못하고 나왔기 때문이었다. 몸이 점점 추위를 느끼고 있었지만, 동이 터오면 좀 나아질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동이 터오면서 눈발이 퍼붓기 시작했다. 아이러니하게도 눈이 오니까 오히려 덜 추웠다. 하지만 눈이 녹으면서 물이 되어 몸과 옷이 젖었기 때문에, 눈을 직접 맞는 것은 곤란했다. 가져온 백팩 위로도 눈이 소복이 쌓이기 시작해서 은박지로 덮어두어야 했다. 눈이 점차 쌓이고, 몸을 움직이면 모자와 은박 담요에 쌓였던 눈이 떨어져 몸에 닿았다. 솔직히 낭패라고 생각했다. 눈이 이렇게 많이 올 줄 알았으면 우산을 챙겨 나왔어야 했는데. 일기예보를 흘려들은 탓이었다. 나는 자리에서 꼼짝도 않고 가만히 앉아있었다. 몸을 움직이면 눈이 담요에서 떨어져서 자꾸 몸이 젖었기 때문이었다. 가만히 있어야 오히려 덜 추웠다. 


눈발이 날려 앞의 무대가 잘 보이지 않을 정도가 되자 주변의 키세스들이 하나 둘 자리를 뜨기 시작했다. 나는 속으로 조금만 더 버티자고 생각해 보았다. 거리에 아무도 없으면 경찰이 눈발을 핑계로 다시 밀려올 것 같다는 두려움이 있었다. 그리고 밤을 꼴딱 새운 사람들은 정말 피곤할 테니 자리를 뜨겠지만 새벽에 온 나는 좀 더 버틸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별다른 재주가 없는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은 그저 자리를 지키는 일이었다. 


하지만 8시가 지나자 정말이지 더는 버틸 수 없었다. 건물에 들어가서 눈을 좀 털어낼 요량으로 자리에서 일어나는 순간 깨달았다. 엉덩이 쪽이 흥건하게 젖었다는 걸. 나름 방수가 되는 바지라고 생각해서 입고 나왔는데, 눈으로 젖은 바닥에 너무 오래 앉아있었던 탓인지 안에 입었던 내복까지 젖었다. 그래도 물이 뚝뚝 떨어질 정도는 아니라 그냥 지하철에서 말려야겠다고 생각하고 뚜벅뚜벅 걸어서 인근의 유리 건물로 향했다. 집회를 하는 내내 1층 공간을 사람들에게 개방해 준 빌딩이라고 했다. 나는 그곳에서 모자와 가방에 쌓여있던 눈을 털어내고 화장실을 갔다 와서 (엉덩이가 어디까지 젖었는지 확인했다.) 한남동을 떠났다. 해가 뜬 후에는 이미 정해진 일정이 있었기 땜누이었다. 


눈오는 한남대로 풍경 (직접 촬영)


내가 거리에 있는 동안 길거리에도 눈이 제법 쌓여있었다. 통행이 통제된 한남대로에는 눈이 소복하게 쌓여있었다. 나는 한남역까지 눈을 밟으면서 뚜벅뚜벅 걸었다. 


그날은 오후에 다시 시위에 참여하지 못하고, 그냥 평범한 일상을 지냈다. 다만 추위에 얼었던 몸이 좀 피곤했기 때문에 간간히 몸을 녹이고 쪽잠을 자고 밥을 먹고 주말에 해야 하는 여러 가지 일들을 했다. (나는 박사 졸업 후에 일반 회사에서 직장 생활을 하면서 주말에 논문 작업을 하며 연구 커리어도 이어가는 애매한 상황이기 때문에 주말이라고 딱히 쉬지는 않는다.) 집회에는 아주 짧은 시간 갔다 온 것이라서 아침에 있었던 일에 대해서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다만 뒤늦게 내 빈자리를 채우러 올 사람들이 나처럼 엉덩이가 젖지는 않았으면 해서 방수 준비를 해오라는 당부를 온라인에 남겼다. 다행히 내가 떠나고 얼마 안 있어 시위는 중단되고 시위대는 건물 안과 난방버스 안으로 피신했으며 기자회견으로 일정이 변동되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다행히 오후가 되자 눈이 그치기도 했고 또 많은 사람들이 모이는 상황을 확인하고 나는 안도했다. 경찰과 큰 충돌이 없고 시민들이 계속 모여있고 집회가 이어진다면 그걸로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민중의 소리 트위터 계정에 올라온 영상을 본 건 순전히 우연이었다. 오후에 올라온 영상을 보며 아침에 내가 이런 꼴이었겠구나, 하고 생각하는데 문득 화면에 익숙한 분홍 담요가 나타났다. 어, 어디서 많이 보던 건데. 잠깐만, 이거 나잖아? 얼굴이 흐릿하게 나왔지만 나는 바로 알아차릴 수 있었다. 아, 내 모습이 찍혔구나. 얼굴을 식별할 수 없어서 오히려 다행이었다. 그냥 내 몰골이 마치 옛날 영화 은행나무침대에 나온 눈 맞는 신현준 같이 생겼다는 생각에 웃음이 났다. 




학창 시절에는 비운동권이었고, 지금도 딱히 활동가로 지내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일상에 무리가 가지 않는 한, 거리 시위에 나서게 된다. 요즘 많은 사람들이 집회에 나서는데, 물론 각자의 이유가 있을 것이다. 나의 경우엔 계엄령 당일 밤에 국회로 가지 못했다는 부채감이 가장 컸다. 그리고 내가 나가고 또 누군가가 나가서, 사람이 많아질수록 활동가 분들이 위험하지 않게 집회를 이어갈 수 있다는 걸 잘 알기 때문이기도 하다. 투표와 시민단체 후원 만으로 왜 부족한 거냐며 투덜거리면서도, 그리고 솔직히 귀찮다고 생각하면서도, 나가야 한다고 생각하면 거리로 나선다. 힘없는 사람들이 거리를 막고 목소리를 낼 정도면 얼마나 절박한 상황인지를 알아서, 그걸 외면할 수가 없다.


이번 비상계엄 이후에 처음으로 거리로 나선 사람도 있었겠지만, 내 경우는 이명박 정권 때부터 꾸준히 기회가 되면 자주는 아니더라도 종종 거리에 나가서 머릿수를 채웠다. 박근혜의 탄핵 시위에도 촛불을 들고 나섰었다. 학창 시절에는 운동권은 아니었지만 학내 시위에서도 밤샘을 하며 사복 경찰들로부터 본관을 지키고, 학생들 이름으로 시국 선언 광고를 내기 위해 계좌 총대가 되어보기도 하며 개인의 단위에서는 나름대로 기회가 될 때마다 참여해 왔다. 그때마다 딱히 대단한 일을 했던 것은 아니고 그냥 그 자리에 서서 머릿수를 채웠다. 말재주가 없고 사람을 이끄는 것도 힘들어하지만, 대신할 수 있는 걸 한다. 그렇게 여러 운동가들에게 느끼는 부채감을 덜려고 한다. 나는 꾸준히 하던 대로 하는 것뿐인데, 그냥 이전엔 촛불 소녀라고 불렸고 지금은 (딱히 응원봉은 없지만 아무튼) 응원봉 연대로 불리고 있다. 


다만 최근에 이어지는 연대의 흐름은 과거와는 확실히 다르다. 과거엔 거리에 나서도 운동권은 그들의 구호를 외치고 나는 다소 겉도는 느낌이었다. (그래도 상관없다고 생각해서 나섰을 뿐이다.) 반대로 당시 사람들은 또 시위에서 운동권의 느낌이 나면 시위에 나서지 않으려 했기 때문에 운동권은 대규모 군중 집회에서는 좀 더 스스로의 흔적을 지우려 했었던 것 같다. 옛날에는 구호를 외치고 민중가요를 부르기 보다는 그저 조용히 촛불을 들었었다. 시위는 과격하고 위험하다는 인식이 있었기 때문이다. 지금은 좀 더 쌍방이 포용적이라는 느낌이 있다. 집회 전문 프로그램을 군중이 일방적으로 관람하기보다는, 시민 참여로 이어지면서 함께 만들어간다는 느낌이 더 강하게 든다. 긍정적인 변화라고 생각한다. 



국회에서 밤을 새우던 날, 너무 추워서 새벽에 국회 앞의 쌍화차 카페에서 잠시 몸을 녹였었다. 카페가 좁았기 때문에 사장님은 강제로 손님들끼리 합석을 시켰다. 나는 한 중년 여성 분과 마주 보고 앉게 되었다. 그분은 넉살 좋게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지방에서 올라오셨는데, 원래도 집회에 자주 나서는 분이시라고 했다. 그러면서 나처럼 젊은 사람들이 나와줘서 고맙다는 이야기를 하셨다. 나는 액면가보다는 더 나이가 있긴 하지만 그냥 젊은 사람인 척하고 그분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반대로 생각했다. 저분은 아마도 나의 미래일 거라고. 나도 나이 들어서도 저분처럼 꾸준히 거리로 나올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그래서 그분에게 고마운 마음이 들었다. (그분은 그날 빈 손으로 나온 나에게 핫팩을 하나 챙겨주셨다.)


내가 지금 거리에 꾸준히 나가야만이, 미래에도 내가 거리에 나갈 수 있는 평화로운 사회가 만들어진다는 사실이, 솔직히 좀 피곤하긴 하다. 하지만 살면서 언제 또 인간 키세스가 되어보고, 깃발을 흔들며 남태령 고개를 행진해 볼 것이며, 혹은 광화문 한복판에서 소녀시대의 다시 만난 세계를 부르고, 혹은 동문 게시판에서 보수 정권 지지자에게 욕을 바가지로 처먹어 보겠는가. 물론 이런 경험들이 끝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앞으로도 또 이럴 일들이 있을 것이고 (물론 이럴 일이 더 이상 없으면 더 좋겠지만!) 그런 때가 오거든, 나는 새벽에 첫 차를 타고 기어 나와 눈을 맞은 키세스가 되었던 것처럼 또 거리로 나서서 내가 할 수 있는 작은 일을 할 것이다. 


남태령 전농 시위 현장의 깃발들 (직접 촬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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