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레이 Sep 22. 2021

주황색이고, 흐릿하고, 따뜻한 아메리칸드림

우리는 바다 건너편에서 바라본 우리의 삶이 아름답기를 바란다

보스턴의 밤은 주황색이고, 흐릿하고, 따뜻하다. 강을 따라 이어진 벽돌 건물들, 그리고 그 뒤에 병풍처럼 서있는 유리 건물들로부터 주홍색 불빛이 새어 나온다. 한때는 누군가의 저택이었을 건물들은 그 내부가 조각나 원룸으로 개조된 지 오래다. 먼 곳에서 찾아와 월세를 내며 사는 이방인들은 밤마다 방으로 돌아와 불을 밝힌다. 외로움과 슬픔, 먼 곳에 두고 온 모든 것들에 대한 그리움은 분명 푸른색으로 빛날 터이지만, 그런 색은 창밖에서는 보이지 않는다. 우리는 이미 서로에게서 멀리 떨어져 있고 이곳에서 지내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점점 더 멀어져 가고 있기에, 지금 이 순간을 채우고 있는 시퍼런 우울은 서로에게 닿기 전 길게 늘어져 변질되어 버린다. 날카로운 감정들은 모두 무뎌져 주황색으로 은은하게 빛나는 과거의 추억으로만 남는다. 그렇게 우리는 다 함께 꿈처럼 아름다운 보스턴의 야경의 일부가 된다.


한국으로 가는 길은 멀다. 직항으로는 14시간, 1번 환승을 하면 20시간, 돈으로 따지면 한 달 월급의 절반이 넘게 드는 길이다. 이곳에서 겪는 모든 감정을 그 모습 그대로 가슴속에 품은 채로 한국으로 돌아가고, 그것들을 하나씩 꺼내어 사람들에게 보여줄 수 있을 만큼 나는 용기 있는 사람이 아니다. 날 것 그대로의 이야기들을 남겨둘 수는 없다. 그것들이 내가 떠난 후 한국에서 어떤 식으로 변화할지 알 수 없다. 나는 그것이 몹시 두렵다. 그러므로 나는 이미 그 위에 주황색 곰팡이가 가득 펴 더 이상 변질되지 않을 추억들만을 꺼내놓는다. 머릿속에서 지나치게 오래 굴려대어 모서리가 모두 뭉툭해진 것들, 이제는 더 이상 아무런 아픔도 느껴지지 않는 것들에 대해서만 조심스럽게 이야기한다.


위대한 아메리칸드림이 무너지지 않도록 그것을 떠받치고 있는 것은 우리가 바다 건너편에 전해주는 이야기들이다. 우리는 바다 건너편에서 바라본 우리의 삶이 아름답기를 바란다. 그러므로 저 먼 곳에서 바라보는 보스턴의 밤은 영원히 주황색일 것이고, 흐릿할 것이며, 따뜻할 것이다. 하지만 가끔은 그런 말만을 남기는 나 자신이 애처로울 때가 있다. 때로는 나 자신 또한 그러한 주황색 빛 안에서 길을 잃은 채로 부드럽고 몽롱한 것들 아래로 한없이 가라앉는 것만 같다. 지어낸 세상이 지나치게 편안하고 부드러워 붙잡은 손을 놓아버린 채로 그 안에서 길을 잃어버리고 싶을 때가 있다.


그러기에 나는 글을 쓰려고 한다. 시간이 너무 오래 지나 기억들이 무뎌져 버리기 전에, 그 기억들이 여전히 파란색일 때 그 안에 있는 감정을 꺼내어 글자들 사이에 박제해두려고 한다. 꿈속으로 아무리 깊이 가라앉더라도 다시 현실로 돌아올 길을 찾을 수 있도록, 지나치게 아름다운 보스턴의 야경 위로 파란색 선을 긋는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