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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레이 Apr 22. 2016

맛있는 깁슨

술꾼이 깁슨에 엄지척 하다

조주기능사 자격증을 따려면 50개(지금은 40개) 칵테일 중에서 랜덤 하게 출제된 3가지 칵테일을 7분 안에 만들어야 한다. 레시피를 열심히 외워야 한다는 얘기다. 그런데 내게 조주기능사 공부를 가르쳐주던 선생님이 이런 말을 했다. 


- 50개 중에서 깁슨은 안 외워도 돼요. 시험장에 펄양파가 없어서 안 나오거든. 


(처음부터 펄양파로 배워놓으니까 이게 좀처럼 고쳐지지 않는다. 바텐더들은 펄어니언, 칵테일 어니언 이렇게 부르던데 내가 펄양파, 이래 버리면 좀 당황하는 듯하더라. 게다가 품위도 없고 ㅜㅜ) 


그런데 사람 마음이란 하지 말라는 건 꼭 하고 마는 법이라 나는 유난히 깁슨에 눈이 갔다. 사실 뭐 시험용 레시피도 어려울 것 없다. 진과 버무스를 섞고 올리브를 넣으면 마티니, 펄양파를 넣으면 깁슨이 되니까. 


조주기능사를 무사히 따고(당연히 깁슨은 안 나왔고 이후 조주기능사 실기 칵테일이 50개에서 40개로 줄어들면서 깁슨은 펄양파의 저주(!) 때문인지 빠져버리고 말았다) 바를 돌아다니면서도 깁슨을 주문할 기회는 오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르챔버에서 뭘 시킬까 고민하고 있는데, 깁슨 어떠세요?라고 바텐더가 물어왔다. 깁슨요? 펄양파 깁슨? 그랬더니 마침 좋은 펄양파가 들어왔다는 거다. 


나는 마티니를 좋아하지만 마티니가 맛있다는 말엔 동의하지 않는다. 마티니는 맛있는 술이 아니라 강한 술이다. 맛있어, 하면서 마시는 술이 아니라 오만 상을 찌푸린 채 폼 잡으며 마시는 술이다(물론 개인의 취향입니다~). 그런데 펄어니언(이제부터는 고쳐 쓴다)을 넣은 깁슨은 마티니처럼 독하지도 않고 새콤한 게 꽤 맛있었다. 이거 괜찮은데요,라고 엄지 척했지만 그 이후로 깁슨을 만날 기회는 흔치 않았다. 


그러다가 바인하우스 사장님이 인스타그램에 올린 깁슨 사진을 보고야 말았다. 반가운 마음에 펄양파가 있었나요? 라며 촌스런 댓글을 달았더니 스페인산과 영국산 ‘펄어니언’이 있다는 우아한 댓글이 돌아왔다. ‘펄어니언’이라고 따옴표까지 붙여가며! 흥! 

얼음이 송송 붙은 부들스 진과 돌린 버무스로 만든 투명한 액체가 바카라 잔에 담겨 나왔고 한가운데 앙증맞은 펄어니언이 들어 있었다. 부들부들한 부들스와 돌린의 우아한 향이 매끄럽게 넘어왔고 펄어니언의 새콤함이 입맛을 깨웠다. 하나면 정 없다며 몇 개 더 내준 펄어니언은 깁슨 한 모금에 하나씩 안주로 좋았다. 아, 맛있네. 감탄사가 절로 나왔다. 

깁슨이 마티니를 대신할 수는 없겠지만, 강한 마티니가 두려운 날엔 깁슨으로 달래도 좋겠다. 바인하우스의 ‘펄어니언’은 내가 다 먹어야겠다. 


#바 #바텐더 #칵테일 #깁슨 #바인하우스 #르챔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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