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레이 Apr 25. 2016

바의 마지막 주문

압생트, 라스트워드 그리고 조엽수림 

바에서 마지막 잔을 고르기란 첫 잔을 고르기보다 어렵다. 더 이상 아쉬움이 남지 않을 잔을 골라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한 때 바에서 내 라스트 오더는 언제나 압생트였다. 


압생트를 적신 설탕이 불에 녹아 떨어지는 모습을 보며, 때론 흐르는 물에 섞여가는 모습을 보며 그날의 주문을 마감했다. 압생트는 여러 잔을 마실 수 없으니 자, 오늘은 여기서 끝… 자연스레 이런 분위기로 흘러가기 때문이었다.


나는 압생트를 알베르 카뮈에게 배웠다. 카뮈의 책에 등장하는 압생트를 읽으면서  미치도록 그 술을 마시고 싶었다. 


“몇 걸음을 옮기면 압생트가 목구멍을 할퀸다. 그것들의 회색빛 솜털이 끝간 데 없이 폐허를 뒤덮고 있다. 압생트의 정수가 열기 속에서 발효하고 땅에서부터 태양까지 하늘도 취하여 휘청거리게 할 알코올이 이 세상 온누리에 걸쳐 피어오른다. 우리는 사랑과 욕정을 만나기 위하여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간다.” 

- 알베르 카뮈 / 티파사에서의 결혼, 중에서 


어렵사리 구한 압생트를 처음 마시던 날, 나는 그 매력에 빠져 버렸다. 코를 찌르는 아릿함, 목구멍을 할퀴는 강렬함, 마신 후 올라오는 화끈함에 반해 버렸다. 자주 마실 수 없었기에 더 그랬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면서 바가 늘고 압생트가 눈에 띄기 시작하면서 마지막 주문을 압생트로 버릇했다. 압생트 이후에 다른 잔을 마시기는 쉽지 않았고 더 마실 수 있더라도 압생트로 확실한 마무리를 지을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하루에 마실 수 있는 칵테일의 수가 무한대에서 일곱 잔으로, 여섯 잔으로, 다섯  잔으로 줄어버린 그 어느 시점에, 압생트는 내게 너무 무거운 마무리가 되어 버렸다. 그리고 때마침 비슷한 느낌의 클래식 칵테일을 알게 됐다. 라스트워드다. 


진과 샤르트뢰즈, 룩사도 마라스키노 체리 리큐르의 조합은 압생트보다 가볍고 깔끔하게 마무리를 대신해줬다. 이름은 또 어쩌면 그렇게 마지막 잔에 잘 어울리는가. 


“바 차가운새벽에서 나의 마지막 이야기, 라스트워드. 더 많은 말을 하고 싶었지만 술은 충분했고 이야기는 과하지 않았다.” https://plain.is/soolkoon/307816

요즘 내가 가장 즐겨하는 라스트 오더는 조엽수림이다. 아직은 멀쩡하다고, 앞으로 열 잔은 더 마실 수 있다고 뇌는 우겨대지만 지쳐 대꾸도 못하는 위를 달래 주기엔 시간을 들여 내린 랍상소총과 에르메스 그린티가 어우러진 초록빛 숲만큼 편안한 술도 드물다. 

보기에도 편하고 마시기도 편한 조엽수림

초록하니까 생각나는, 시인 도광의 선생(안도현, 서정윤 시인을 가르치셨다 해서 유명해진 ^^)의 초록 엽서라는 시를 빌려 온다(안도현 선생은 시를 제멋대로 빌어가 쓰는 사람들 때문에 시가 욕본다고 했는데 ㅜㅜ). 


"연초록 그늘 밑에 앉아

초록으로 색을 바꾸고 있는 

바람결에 몸을 맡기고 이렇게 적는다.


어제는 울적했다고 

어제는 고달팠다고 

이렇게 적는다.


오늘은 마른풀 사이로 

삐죽이 고개 내민

소루쟁이가 눈부신 하루라서

고맙고도 눈물 난다고 

이렇게 적는다"

- 도광의 / 초록 엽서 


초록으로 색을 바꾸는 내 마지막 잔으로 하루를 달랜다. 삶은 여전히 고맙고 눈물 난다.  


#바 #칵테일 #압생트 #라스트워드 #조엽수림 

작가의 이전글 맛있는 깁슨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