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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레이 May 07. 2016

로즈라임 김릿, 챈들러 & 빅블루

술꾼이 로즈라임으로 만든 김릿을 처음 마시다

(2014년 8월에 쓴 글을 다시 옮겨 왔습니다 ^^)


술이라곤 소주 밖에 모르던 시절에도 기나긴 이별을 읽자마자 나는 레이먼드 챈들러의 팬이 되어버렸다. 위스키와 칵테일을 알고 나선 광팬이 되어버렸다. 챈들러 때문에 닉네임을 레이라고 지은 건 아니지만, 레이라는 닉네임이 챈들러 때문이라고 말할 정도로. 아무 것도 읽기 싫은 그런 머리 복잡한 날엔 기나긴 이별을 꺼내 읽고 김릿 마시는 상상을 할 정도로.


그런 내게 로즈라임 김릿은 마셔보고 싶은 술 1위가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우리나라에선 로즈라임을 갖춘 바가 별로 없고, 그렇다고 내가 로즈라임을 직접 주문할 깜냥도 못되어 속으로 침만 질질 흘리던 판국이었는데, 아는 바텐더의 페이스북에서 로즈라임이 있는 바를 알게 됐다. 으아아아, 여기 어딘가요, 당장 가고 싶어요, 라는 답글을 달면서 재빠르게 검색을 했더니, 오마이갓. 우리 집하고는 정반대인 방화동에 있는 웨스트햄릿이란다. 로즈라임 김릿을 미치도록 마시고 싶었다면 가야지, 갔겠지. 하지만 두시간 넘게 왔다갔다 할 기회는 좀처럼 오지 않았다(라고 쓰고 나니… 정말 간절히 원했다면 벌써 갔을 거야 하는 생각이 들기도 ㅜㅜ).


그러던 어느 날, 두 번째 찾은 홍대 빅블루에서 우연히 웨스트햄릿 얘기가 나와 웨스트햄릿에 로즈라임이 있대요, 으아아, 가고 싶어, 이러는데 빅블루 사장님이 우리도 있어요, 하면서 로즈라임 코디얼을 꺼내놨다. 오마이갓. 이 기분을 뭐라 설명해야 할까. 순간 멍했고, 짜릿했고 정신을 차라지마자 호들갑을 떨었다.


- 그걸로 김릿 주세요. 챈들러 오리지널 레시피로.

- 일대일로 하면 좀 달 거 같은데요.

- 괜찮아요. 괜찮아요.


“사람들이 김릿이라고 부르는 건 그냥 라임이나 레몬주스에 진을 섞고 설탕이나 비터를 약간 탄 것에 지나지 않아요. 진짜 김릿은 진 반, 로즈라임 주스 반을 섞고 그 외에는 아무 것도 섞지 않아요. 마티니 같은 건 비교도 안되지.”- 레이먼드 챈들러 / 기나긴 이별 / 박현주 옮김 / 북하우스   

처음으로 마신 로즈라임 김릿

드디어 로즈라임 김릿이 왔다. 오늘따라 잔을 꽉꽉 채우는 빅블루 사장님의 솜씨가 고마웠다. 흘릴까봐 잔을 들지도 못하고 입을 댄채 로즈라임 김릿을 마셨다. 챈들러가 떠올랐다.


“바텐더는 내 앞에 술을 놓아주었다. 라임주스를 넣으니 약간 연한 녹색과 노란빛이 감도는 신비한 색깔이 됐다. 나는 맛을 보았다. 달콤한 맛과 찌르는 듯한 날카로운 맛이 동시에 났다.”- 레이먼드 챈들러 / 기나긴 이별 / 박현주 옮김 / 북하우스 


그래, 로즈라임 김릿이 이런 맛이었구나. 달콤하면서도 찌르는듯 날카로운 맛. 생각보다 달지 않았다. 지금까지 마셔온 날카롭게 날이 선 드라이한 김릿도 좋지만, 달콤함 뒤에 밀려오는 콕 찌르는 날카로운 맛도 매력있었다.


“같은 걸로 두 잔 더요. 부스 자리로.”- 레이먼드 챈들러 / 기나긴 이별 / 박현주 옮김 / 북하우스 


기나긴 이별의 주인공 말로는 로즈라임 김릿 두 잔을 청하고 자리를 옮기면서 요즘 흔히 하는 말로 썸을 타기 시작한다. 평소 주량 대로라면 나도 한 잔 정도는 더 마실 수 있었다. 하지만 나는 로즈라임 김릿을 마지막으로 일어섰다. 그 어떤 잔도 이 흥분을 다독일 순 없을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칵테일은 맛있고 여운은 길게 남았다. 힘들지만 웃을 수 있는 밤이 깊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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