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집 주어는 나인가 고양이인가
우리말에는 주어를 생략할 수 있다는 어마 어마한 장점이 있다. 글쎄, 모든 일은 동전의 양면 같은 거라서 꼭 좋다고 할 수는 없겠고, 아마도 특징이라고 해야 할까 싶지만 말이다. 그래서 그 유명한 "주어가 없지 않으냐"는 희대의 개소리가 나오기도 했겠다.
가족처럼 작은 모임에서 대화할 때 주어를 생략해도 되는 일이 종종 있다. 분위기로 보아 대충 말하는 걸 알아들을 수 있다. 그러나 요즘 우리 집에선 주어를 생략하면서 웃지 못할 사건이 일어난다.
엄마 : 밥 먹었니?
나 : 아뇨, 아직 안 먹었어요?
엄마 : 아니, 너 말고 우주.
나 : 으엥??
할머니 : 화장실 다녀왔니?
손녀 : 아니요, 이제 씻으려고요.
할머니 : 아니, 너 말고 우주.
손녀 : 아, 할머니?!
할머니 : 우주가 몸을 좀 긁던데
손녀 : 글쎄요, 많이 가려운가?
할머니 : 엄마한테서 옮은 거겠지?
며느리 : 아니요, 어머니, 전 아니에요...
할머니 : 아니, 너 말고 우주 친엄마
며느리 : 어머닛!!
고양이를 키우자고 했을 때 가장 걱정이 많았던 엄마는 우주 때문에 운동 시간도 줄였고 (애기가 눈에 밟혀서 빨리 돌아오고 싶다던가) 외삼촌 생신 모임에도 안 가고 있다. 뭔가 세상이 고양이 중심으로 변화하고 있는데 그래서 내가 약간 어지러운가 보다. 고양이로 인해 가족 관계가 바뀌고 주어가 흔들리고, 세상이 변한단 말이야. 베르나르 베르베르가 왜 문명 시리즈를 썼는지 알 것 같다. 내용이 조금 오버하는 것 같아서 그만 읽었는데 지금 읽으면 완전 몰입할 것 같다.
고양이는 스스로 인간을 택한 동물이라고 하는데, 왜 이제서야 나를 택했는지 조금 억울하기도 하다. 야근 그만 하고 고양이 보러 가자. 오늘 기분도 영 꿀꿀한데(꿀꿀하다고? 그럼 기분 좋을 땐 영 야옹야옹한데, 이래야 하는 건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