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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레이 May 09. 2016

위스키와 플라스크

술꾼의 플라스크 속에는 무엇이 들었을까 

“저는 술을 한 방울도 못 마십니다만, 만일의 경우를 대비해 항상 가지고 다닙니다. 그리고 지금이 바로 그때가 아니겠습니까?”

“그렇겠군요.” 하고 콘웨이는 심각한 어조로 대답했다. 그리고 병마개를 열어 냄새를 맡고, 사나이의 입 속으로 브랜디를 흘렸다. 

“그에게는 다시없는 약입니다. 고맙습니다.”

- 제임스 힐턴 / 잃어버린 지평선, 중에서 / 이경식 옮김 / 문예출판사


(제임스 힐턴의 잃어버린 지평선은 리조트나 칵테일 이름으로 유명한 ‘샹그릴라’라는 단어를 제일 처음 사용한 것으로 유명하다)


비행기를 납치한 조종사가 심장마비를 일으켜 콘웨이 일행은 티베트 오지 한가운데 불시착한다. 사건이 일어나려면 조종사는 진실을 밝히지 않고 죽어야 하는 법. 그러나 기독교 전도자 브린클로 여사는 핸드백을 뒤진 후 의외의 물건을 내놓는다. 바로 브랜디다. 브랜디로 콘웨이는 조종사를 깨우는 데 성공하고, 조종사는 ‘샹그릴라’라는 의문의 키워드를 던진 채 사망한다. 스토리 전개 상 어쨌든 샹그릴라로 가겠지만 브랜디로 혼수상태에 빠진 조종사를 깨워 비밀의 단어를 듣는다는 아이디어가 즐겁다. 


브랜디나 위스키는 생명의 물이라는 어원처럼 옛날엔 종종 약으로 쓰였다. 알프스 구조견 세인트 버나드의 목에 달린 통에 브랜디가 들어 있다는 이야기는 이제 뭐 새로울 것도 없다. 

요즘 술꾼의 플라스크엔 글렌파클라스 21이 들어 있다

나는 약으로 쓸 일도 없고 인명을 구할 일도 없지만 종종 플라스크에 위스키를 담아 다닌다. 켈트 십자가가 새겨진 이 꽤 고급스러운 플라스크는 영국 출장을 다녀온 우리 사장님이 딱 내 생각이 나서 샀다는데 갖고 다니기에도 꽤 폼이 난다. 위스키 4 온즈가 들어가는데 가벼운 산책길이나 살짝 낮술을 하고 싶을 때, 비가 내리거나 추운 겨울에 커피숍 같은 데서 몸을 데울 때 아주 좋다. 


이걸 자랑하다 보면 어떻게 닦느냐고 묻는 분들이 가끔 있는데 나 혼자 먹는데 닦긴 뭘 닦나. 안 닦는다… 하는 건 농담이고 사실은 입을 대고 마신 적이 거의 없다. 어딘가에 따라 마시거나 커피나 얼그레이 티에 타서 마신다. 그래야 남들 한 잔 덜어주기도 좋고(닦을 때는 물을 넣어서 그냥 열심히 흔든다 ^^). 


요즘 이 안엔 글렌파클라스 21년이 들어 있다. 인명을 구하는 용도로는 쓸데없지만 가끔 지친 내 영혼을 달래는 용도로는 꽤 쓸만하다. 사람이란, 술꾼이란 어차피 가끔 지치기도 하는 법. 한숨 달래고 넘어갈 비상수단이 있다는 건 은근히 즐거운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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