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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레이 May 04. 2023

선수의 권리

이고은 선수를 응원합니다(원래도 했지만 쫌더!)

배구 프로 리그에서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는가? 어안이 벙벙한 채로 23~24 FA 시즌이 끝났습니다. V리그는 다른 스포츠나 리그와 달리 트레이드나 이적이 많지 않습니다. 실제로 21~22년에는 이소영 선수가 지에스칼텍스에서 인삼공사, 22~23년에는 이고은 선수가 도로공사에서 페퍼저축은행으로 이적하는 정도였으니까요(물론 빅뉴스이긴 합니다만, 딱 그 뉴스 하나였어요). 그런데 23~24 시즌에는 FA가 많기도 했지만 좀 웃기는 일이 있었습니다. 다 아시는 것처럼 페퍼저축은행이 도로공사로부터 박정아 선수를 데려오면서 보상선수로 이고은 선수를 내준 사건입니다. 정확히 말하면 이건 사건이 아니라 사고입니다. 


페퍼저축은행(이하 페퍼)의 어이없는 행보에 팬들은 분노했고, 언론도 난리였으며 이고은 선수는 반응을 드러내지 않았습니다. 이어진 페퍼의 설명은 아니함만 못했습니다. 도로공사의 샐러리캡이 모자라 이고은 선수를 데려가지 않을 거라고 예상했다, 는 게 그 답인데, 아니 주전 세터를 놓고 어떻게 그런 잔머리를 굴릴 수가 있을까요?


결국 페퍼는 도로공사에게 최가은과 다음 시즌 1라운드 지명권을 주고 이고은 선수를 다시 트레이드해 옵니다. 다른 데서는 세터를 구할 수가 없고 지난 시즌 이고은 선수의 활약상을 볼 때 이 정도로 보상은 해야 했나 봅니다. 


이 과정에서 도로공사는 정대영 선수가 떠나면서 생긴 미들 블로커의 빈자리를 젊은 미들 블로커로 대체했고 다음 시즌 신인 1순위 지명권까지 확보했으니 제일 좋은 거래를 한 셈입니다. 페퍼는 잔머리 굴리다가 선수만 보내도 되었을 걸 지명권까지 날려버렸고요, 그리고 제일 큰 피해는 이고은 선수가 입었겠지요. 최가은 선수는 섭섭했겠지만 도로공사 팀과 함께 우승 보너스인 미국 여행을 떠나게 됐으니, 그나마 위로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보상선수를 데려가기 전에는 보호선수 명단을 제출합니다. 보호선수 명단은 ‘우리 팀에 꼭 필요한 선수들이니 절대 넘보지 마라.’ 하는 선수들이고요, 이 명단은 공개되지 않습니다. 거래 당사자인 페퍼저축은행과 도로공사만 알 뿐이에요. 외부에서는 그냥 예상할 따름입니다. (뭐, 아는 분들도 있겠지만요)


이 제도의 가장 큰 문제점은 보호선수 명단과 보상선수를 지정하는 과정에서 선수의 의사는 전혀 반영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계약 기간이 얼마 남아있건, 선수가 싫든 좋든 그냥 무조건 보상선수로 지명되면 가야 합니다. 이번 경우에도 이고은 선수가 가장 늦게 알았다고 합니다. 휴가 중인데, “너 박정아 보상선수로 다시 도로공사로 가야겠다.”라고 연락을 받으면 얼마나 당황할까요? 게다가 1년 전에 그 팀에서 FA로 벗어나서 페퍼로 이적한 선수에게 말입니다. 


보상선수 제도는 특정 팀에 좋은 선수가 몰리는 것을 예방하기 위해서라지만 본심은 그게 아닌 것 같습니다. FA로 이적할 때 데려간 팀은 원래 소속팀에게 보상금을 줘야 하는데, 그게 연봉의 100~300 퍼센트이다 보니 돈으로는 해결 못하겠고 우리 남는 자원에서 선수를 하나 데려가라, 는 거겠지요. 당연히 좋은 선수는 주기 싫고 예비 인력을 주고 싶을 텐데 아무나 막 골라가면 큰일이니 보호선수를 만드는 것일 테고요. 이래서 보호선수 명단은 공개하지 않습니다.


여기까지 쓰다 보니 마치 보상선수가 노예 계약처럼 보이기도 하는데, 보상선수 제도가 그렇게 나쁜 것만은 아닙니다. 트레이드 같은 절차를 거치기 어려운 선수들이나 후보 선수들은 오히려 다른 팀으로 가서 자기 실력을 제대로 뽐낼 수도 있겠고요, 또 다른 기회가 되겠지요. 하지만 보상선수 제도를 어떤 선수의 이적으로 인해 생긴 공백을 메우는 제도가 아니라 다른 목적으로 사용할 때 문제가 생깁니다. 


예컨대 22년에 이소영을 인삼공사로 보낼 때 지에스칼텍스는 보상선수로 오지영을 선택했죠. 이 때도 조금 소란했는데 지에스칼텍스는 이미 리베로 자원이 충분했기 때문입니다. 리베로가 세 명이나 있는데 굳이 다른 선수 말고 오지영을 데려간 이유는 무엇일까요? 이건 순전한 뇌피셜이지만 차상현의 엿 먹어라 작전이라고 생각합니다. 어차피 데려올 만한 포지션 선수도 없고, 주전 리베로를 보호선수로 묶지도 않았으니 전력이나 약화시키자, 하고 데려왔을 거 같아요. 오지영이 와서 주전을 했을까요? 몇 번 했던 것 같습니다만 지금 오지영 선수는 페퍼에 가 있죠. 


도로공사는 왜 이고은을 선택했을까요? 물론 도로공사는 사정이 좀 다릅니다. 게임에서 직접 활용할 수 있는 세터는 이윤정과 안예림인데 안예림 선수가 아직도 성장하는 중이라 온전히 믿고 맡기기엔 아직 어리다고 할까요? 그래서 이고은을 선택했을 거라고 봅니다. 안정적인 세터가 두 명 있다는 건 틀림없이 유리한 조건이니까요. 

이런 해괴한(!) 사진은 이제 좀 없애자고요. (아니 도공 시절 고은 선수 사진은 없앴나요?)

하지만 결과는 이고은을 돌려보내는 대신 최가은과 지정권을 받는 것으로 드러났습니다. 도로공사도 굳이 이고은 선수가 필요했던 건 아니네요. 충분히 트레이드가 가능한 자원이라서 데려왔다고 밖에는 할 수 없을 듯합니다. 


선수의 의사와 상관없이 일어나는 이런 보상선수제가 과연 누구를 위한 것일까요. 선수를 위한 건 절대 아닐 겁니다. 그렇다고 팬을 위한 것일까요? 그렇다면 배구 관련 게시판들이 이렇게 시끄럽지는 않겠죠. 


경기는 선수들이 합니다. 그리고 그 선수들에 대한 권한은 모두 협회와 구단이 가져가죠. 리그가 운영되려면 당연히 필요한 일일 겁니다. 하지만 말이죠, 적어도 의사를 물어보고 존중해야 하지 않을까요? 보상선수 논쟁에 책임 있는 여러분들, 이고은 선수 처지라면 뭐라고 말씀하시겠어요? 경기는 선수들이 하고 리그가 운영되는 건 팬이 있기 때문입니다. 선수들의 마음을 더 상하게 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어떻게 하란 말이냐고요? 그건 돈 받으시는 분들이 알아서 하셔야죠~ 저는 그저 팬인 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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