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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레이 Sep 26. 2016

텐더의 맨해튼

네모난 달을 품은 텐더의 맨해튼이 웃었다 

그 날은 맨해튼을 주문하면 안 되는 날이었다. 전날 미스터사이몬에서 진피즈를 시작으로 맨해튼과 발블레어, 사이드카, 마무리로 모스코뮬까지 기세 좋게 마셔대고 장렬히 전사한 까닭에 그 날은 도저히 센 술을 마실 상황이 못되었다. 그래서 원래는 얌전히 집에 들어갔어야 했지만, 광화문에 일이 있었다. 술꾼이 도저히 지나칠 수 없는 경복궁역 7번 출구 동네까지 아무리 천천히 걸어도 10분이면 가는, 그 광화문에 가야 했단 말이다. 


일 마친 후 당연히 이자까야 나나를 찾았다. 오랜만에 들른 나나는 여전히 편안했고 맛있었…지만 속이 반쯤 너덜너덜했던 나는 연한 나마죠죠 한 병을 끼적거리며 오뎅 국물로 속을 달랠 뿐이었다. 굉장히 걱정스러운 얼굴로, 나나 사장님이 텐더 가실 거냐고 물었다. 갈 수 있겠냐는 뜻이었겠지. 하지만 나는 쓰러져도 텐더에서 쓰러지겠다는 마음뿐이었다(오버 좀 작작해라).


텐더에서 첫 잔으로 슬로진피즈를 시킨 건 나로서는 최선이면서도 현명한 선택이었다. 예상보다도 더 슬로진피즈의 힘은 대단했다. 탄산과 함께 스며든 새콤달콤한 슬로진피즈는 위장에 다다름과 동시에 뇌를 속이기 시작했다. 

바에 앉아 술깨는 술(!)을 마시고 싶다면, (맛있는) 슬로진피즈가 딱이다. 

“술 확 깨는데? 더 마실 수 있겠어!” 


그래서 덤빈 두 번째 잔은 (텐더니까) 김렛이었다. 하지만 약간 오해를 했다. 나는 텐더 바 사장님을 처음 만난 홍대 빅블루에서 챈들러 스타일의 김렛을 배웠던 까닭에 텐더 바 사장님의 김렛은 챈들러 스타일일 거라고 제멋대로 생각하고 있었다. 걸쭉하면서도 진한 김렛이 속을 한 번 코팅해주겠지, 그런 음흉한 의도로 김렛을 주문했던 것이다. 


하지만 김렛은 챈들러 스타일이 아닌 하드 셰이킹 스타일로 나왔고(만드는 과정 중에 내 착각을 깨닫긴 했다) 아, 이건 좀 센데, 하는 걱정으로 잔에 입을 들이댔으나 예상과 달리 김렛은 몹시도 시트러스, 시트러스 했고 입에 들어가는 순간 입 안의 모든 침샘을 쫙쫙 끌어당겼다. 내가 기대했던 맛은 아니었으나 내가 원했던 목적은 두 배로 달성해준 것이다. 이렇게 슬로진피즈에 속은 뇌는 김렛의 시트러스에 완전히 넘어가고 말았다.

텐더는 김렛 맛집이다 

그래서 맨해튼을 주문하고 만 것이다. 심지어 안티카 말고 다른 스위트 버무스는 없냐는 강짜를 부려가며. 


“요즘 다들 안티카 포뮬라를 쓰니까 맛은 있는데 재미가 없어요.”


사장님은 나를 어여삐 여겨 푼트에메스를 꺼내 줬다. 솔직히 눈을 가리고 마시면 안티카인지 푼트에메스인지 아니면 뭐 또 다른 것인지 내 어찌 구분할까. 그러나 나는 눈이 있는 사람이고 시각이 주는 효과를 감사해하는 사람이니 맛을 구분하는 것과는 별개로 다른 스위트 버무스를 마실 자격이 있는 셈이다(뭔 소리래 ㅜㅜ). 


맨해튼은 강했고 화려했다. 한 모금을 넘긴 후에야 비로소 나는 뇌가 속고 있었음을 깨달았다. 나는 아직 맨해튼을 맞이할 준비가 안되었던 거다. 강한 술을 느낀 심장은 쿵쿵거렸고 숨이 차올랐다. 알코올에 절인 체리는 엎친데 덮친 격으로 술꾼의 위장을 공격했다(그런데 맛있어!). 잘못했어요, 디오니소스에게 빌었으나 주신은 용서 따위는 모르는 법이다. 얼큰히 취한 신께서 무슨 용서 따위를 아시겠어. 그냥 더 취하라 취하라 말할 뿐일 텐데. 

텐더의 맨해튼엔 네모난 달이 뜬다 

네 잔까지 기대했으나 맨해튼에서 멈췄다. 잘했어요. 담엔 까불지마, 맨해튼이 말하는 듯했다. 흥, 내 이대로 돌아가지만 다음엔 꼭 다시 찾아오겠어. 간신히 마지막까지 잔을 털어냈으나 네모난 달을 품은 맨해튼은 여전히 웃고 있었다. 


술 앞에선 겸손해야 한다는 걸 새삼 깨닫는다. 겸손할 때 술은 친구가 되지, 교만하게 들이대면 술은 적으로 돌아선다. 하긴 어디 술뿐인가, 사람도 결국 그런 법이거늘. 술에게 또 하나를 배운다. 그러나 역시 돌아서는 인간은 어리석다. 언젠간 내 너를 이기고 말겠다, 마음먹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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