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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레이 Oct 12. 2016

아껴둔 스카치 한 병, 글렌모렌지

특별한 날 마실 술이라면, 술꾼은 글렌모렌지 시그넷을 추천한다

“나는 딱딱하게 얼어붙은 눈 더미를 지나가는 것처럼 간이 부엌으로 가 잔을 꺼내고 진짜 상류층 아가씨를 유혹할 때 쓰려고 아껴두었던 스카치위스키 한 병을 늘어놓았다. “ 

- 레이먼드 챈들러 / 안녕 내 사랑(Fairwell, My Lovely) / 박현주 옮김 / 북하우스 


술꾼이라면 이쯤에서 궁금해할 만하다. 위스키를 입에 대고 사는 레이몬드 챈들러의 필립 말로가(주인공은 작가의 경험에 비추어 탄생한다는 점을 고려할 때, 어쩌면 레이몬드 챈들러가) 상류층 아가씨를 유혹할 때 쓰려고 아껴 두었던 스카치위스키가 도대체 뭘까, 하고 말이다.


오죽 궁금했으면 나는 이 장면이 영화에 나올까 싶어 로버트 미첨이 필립 말로로 나오는 1973년작 Farewell My Lovely를 굳이 찾아보기까지 했다. 그런데, 영화에는 이 장면이 아예 없었고 이 장면에 필요한 위스키는 더더구나 등장하지 않았다. 그러니 결국은 상상의 나래를 펼 수밖에. 그런데 말로의 경제 상황을 생각해 볼 땐 딱히 그렇게 비싼 위스키라고 생각이 들진 않는다. 게다가 위스키에 대한 챈들러의 생각을 엿보면 몇십 년씩 된 고급 위스키가 아닐 것도 같다.  


“There is no bad whiskey. There are only some whiskeys that aren't as good as others.” 

“나쁜 위스키는 없다. 다른 것보다 조금 덜 좋은 위스키가 있을 뿐.” 


멋지지 않나? 그래서 아마도 챈들러는 상류층 아가씨를 유혹할 만한 위스키가 굳이 어떤 건지 밝히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아마 이런 생각이지 않았을까.


“유혹할 수 없는 위스키는 없다. 다른 것보다 조금 덜 먹히는(!) 위스키가 있을 뿐.” 


나는 위스키에 대해서 잘 알지도 못하고, 게다가 뭐 딱히 유혹하는 용도로 쓸 일도 없지만, 그래도 명색이 술꾼이고 누군가가 내게 유혹할 만한(!) 위스키를 추천하라고 하면 나는 주저 없이 글렌모렌지 시그넷을 추천하겠다.  

글렌모렌지 홈페이지의 시그넷 소개 영상 중에서 캡처. 술꾼이 이런 걸 찍을 리가 ㅋ 

커피와 위스키의 결합을 연구하다가 몰트를 로스팅해 만들었다는 글렌모렌지 시그넷은 은은한 커피 향과 초콜릿향이 위스키의 독한 맛을 살짝 가려주는 그야말로(‘그야말로’는 ‘필립 말로’ 동생인가… 라는 몹쓸 생각이 ㅜㅜ) 레이디를 위한 위스키다. 진한 색깔과 기분 좋은 향, 마신 후 따라오는 커피나 초콜릿 맛이 이런 위스키도 있나 싶은 생각이 들 정도니까. 


굳이 시그넷이 아니어도 글렌모렌지 위스키 시리즈는 부드럽고 향긋한 데다가 병도 예뻐 여성들이 제일 좋아하는 위스키 중 하나다. 글렌모렌지 증류소 고유의 샘에서 난 물과 17피트에 달하는 목이 긴 증류기, 직접 엄선한 나무로 무려 8년의 세월 동안 갈고닦아 숙성한 배럴. 이 세 가지가 글렌모렌지의 우아하고, 세련되고, 향기로운 맛을 만들어 낸다… 고 글렌모렌지 마스터 디스틸러인 빌 럼스던 박사가 2016년 10월 11일 그랜드하야트에서 열린 글렌모렌지 시음회에서 말했다. 술꾼이 이런 걸 알 수 있을 리가. 

날마다 이렇게 한 세트로 한 잔씩 마시면서 살았으면. 

시음회를 다녀와서 글렌모렌지에 대한 호감이 폭발하는 중이지만(참가비 보다 더 많은 걸 얻긴 했어도 엄연한 유료 시음회였다!), 사실 나는 시음회 전에도 이미 글렌모렌지를 꽤 애호하는 술꾼이라서(아직 버리지 못한 시그넷 빈 병 3개와 18년 빈 병 1개가 증명할 것이다), 여전히 글렌모렌지를 이뻐할 것이다. 상류층 아가씨를 유혹할(!) 일은 없지만 글렌모렌지 시그넷은 특별한 날에 잘 어울리는 술이기 때문이다.


(사실 이 글은 몇 년 전에 블로그에 끄적거렸던 걸 살짝 고친 거다. 다시 쓰고 싶었는데 어쩐지 이때보다 더 잘 쓸 자신이 없어서 일부만 그냥 고쳤다. 귀찮아서 그런 건 절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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