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스호퍼가 마지막 잔을 마시고 떠나는 술꾼의 기분을 즐겁게 하다
그때는 지겹게도 무더웠던 여름을 힘겹게 넘긴 시월의 초순이었다. 극심한 스트레스와 여름 내내 나를 괴롭힌 안면 홍조 때문에 일부러 술을 줄였던 터라 그 여름이 내겐 더 힘들었다. 체력은 이미 바닥을 드러냈고 감정은 여유가 없었다. 그래서 시월의 첫 술자리를 더 기대했던 모양이다. 힘겹던 여름을 이겨 낸 대가로 일종의 보상을 막연히 요구했던 것처럼.
술자리는 즐거웠고 편안했다. 내자동 이자카야 나나의 꼬치구이는 언제나처럼 술맛을 돋아주었고 시메사바는 생선을 즐겨하지 않는 술꾼의 안주 포트폴리오(!)를 넓혀 놨다. 어느 틈에 큰 사케 한 병, 작은 사케 두 병이 사라졌고 우리는 부른 배를 탓하고 남은 안주를 아쉬워하며 일어서야 했다. 텐더를 가야 하니까.
다케스루와 맨해튼으로 시작했다. 술 얘기를 떠벌리고 음악 얘기를 들었으며 유난히 힘들었던 지난여름을 투덜거렸다. 올드 그랜 대드가 들어간 그야말로 올드한 올드패션드를 마셨고, 쌉쌀하고 시원한 맛이 그리워 스즈토닉을 마셨으며 오래간만에 흥겨운 솔티도그를 주문할 즈음, 미리 사정이 있던 동행이 일어섰다. 평소 같았으면 나도 동행을 따라나섰겠으나 그 날은 더 머무르고 싶었고, 그 역시 내 마음을 이해했다. 이럴 땐 악수보다 허그가 더 자연스러운 법이다.
평소 주량을 살짝 넘었다는 걸 알았지만, 동행까지 먼저 보내고 남았는데 멈출 수는 없는 일이다. 마지막으로 한 잔만, 하는 마음에 가볍고 깔끔한 조엽수림을 주문했다. 개운하면서도 담백하지만 뒤이어 쫓아오는 단맛에 흐뭇해지는 조엽수림은 마지막을 장식하기에 참 좋은 잔이다.
몇 달 전 마신 술 이름을 어떻게 이리 잘 기억하느냐고? 천만에, 기억 못 한다. 그래서 마시는 술마다 꼭 사진을 찍는다. 내가 무엇을 마셨는지 머리는 기억하지 못해도 아이폰은 기억할 테니. 그런데 문제는 조엽수림이 아니었다. 조엽수림을 마셨지만 여전히 성이 안 찬 나는 무언가 한 잔을 더 필요했고 텐더 점장님은 내게 어떤 잔을 권했다. 이름도, 맛도 기억나지 않았지만 확실히 하나는 기억났다. 그 잔을 마시고 나는 정말 기분이 좋아져서 텐더에서 일어났던 것이다.
다음 날, 아무리 사진을 보고 또 봐도 이게 무슨 잔인지 기억할 수가 없었다. 오죽하면 텐더에 전화를 해서 물어볼까도 싶을 정도로 궁금했지만 나는 생각보다 수줍은 사람(!)이라 그러지도 못했다. 다음에 가면 물어봐야지, 차일피일 미루다가 정말 엉뚱한 데서 해답을 찾았다. 영수증에 칵테일 이름이 있었던 것이다. 그 칵테일은 바로 그래스호퍼였다.
그래스호퍼에 대한 기억이 얼마나 좋았던지, 나는 그 다음부터 바에 가면 마지막 잔으로 그래스호퍼를 주문하기 시작했다. 바텐더마다 사용하는 술이 다르고, 재료가 다르고, 스타일이 다르고, 만드는 기법도 다르지만 시원하고 개운한 민트와 부드럽고 달콤한 초콜릿 맛이 기막히게 어우러지는 그래스호퍼는 어디서 마셔도 기분이 좋았다. 술자리가 적당했건 과했건, 조용했건 흥분했건, 힘겨웠던 편안했던 간에 그래스호퍼는 바를 나서는 기분을 상쾌하게 만들어줬다. 바를 떠나는 사람을 기분 좋게 만들어준다는 것, 이보다 더 훌륭한 잔이 어디 있단 말인가.
게다가 정말 놀랐던 점은 그래스호퍼를 주문받는 바텐더들이 저마다 무척 열심히 그래스호퍼를 만든다는 것이다. 낡고 촌스런 클래식 칵테일이라고만 생각해 주문할 때마다 거절당할까 걱정했는데, 주문도 즐겁게 받고(바텐더가 제일 좋아하는 칵테일이라며), 셰이킹도 열심히 하고(진짜 잘 섞여야!) 플레이팅(메뚜기가 뛰어놀도록!)에도 꽤 정성을 들였다. 이러니 저마다 다른 바텐더의 그래스호퍼를 마시지 않을 수 있겠는가.
나는 주류 전문가도 아니고 술에 대해 해박한 지식이 있는 것도 아닌(뭐, 그래서 이렇게 말하는지도 모르겠지만) 그저 동네 아저씨 술꾼에 지나지 않지만 좋은 칵테일은 마시는 사람의 경험을 존중하는데서 태어난다고 생각한다. 그래스호퍼는 충분히 그럴 가치가 있는 칵테일이다. 비록 어떤 누구가가 내게 가글 맛이 난다고 지적질을 했을 지라도.
PS> 술꾼한테 내준 것처럼 내주지 않는다고 투덜거리지 마라. 나도 같은 바에서 그래스호퍼를 계속 주문하지만 그 날 바의 상황, 재료, 바텐더의 상태 등에 따라서 조금씩 다른 칵테일을 마신다. 그리고 나는, 그렇게 조금씩 변화하는 칵테일이 더 좋다. 날마다 똑같은 그래스호퍼만 마시면 재미없으니까. 이런 말도 있다. 딱 어울리는 것 같진 않지만. “개인은 저마다 다르므로 남과 지나치게 비슷한 것이 오히려 비정상이다.” (시오도어 젤딘, 인생의 발견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