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한 술꾼이 일행과 함께 바에서 목소리를 높였다
길을 걷는데 누군가 내 이름을 불렀다. 순간 잘못 들었나 싶었지만 틀림없이 내 이름이었다. 고개를 돌려 약간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소리가 난 쪽을 돌아 보았다. 누군가 낯익은 사람이 나를 쳐다 보고 있었다. 다행히 메모리가 녹슬지 않았고 나는 초고속으로 스캔한 끝에 십사오년 전 친하게 지냈던 K선배라는 걸 떠올렸다. 솔직히 말하면 내가 떠올린 것도 신기하지만 사실은 K선배가 내 이름을 기억하고 있다는 게 정말 신기했다. 아, 선배! 그렇게 십사오년 만의 만남이 시작됐다.
편의점 앞 의자에 앉아 짧은 순간 수많은 얘기들이 오갔다. 어떻게 지냈는지, 어디 사는지, 지금은 무슨 일을 하는지. 그렇게 우연한 만남이 이어지고, 같이 친하게 지냈던 또 다른 선배의 연락처까지 확인한 끝에 결국 셋이 술 자리를 만들고 말았다.
세월은 흘렀어도 그 시절 그 캐릭터들은 여전했다. 아무리 나이를 먹었어도 나는 막내였고 술을 핑계로 끝까지 들이댔다. 장난과 농담은 끊이질 않았고 어느새 우리는 흑돼지 집에서 한라산 네 병과 청하 한 병을 비운 채 다음 술자리를 찾아 나섰다. 바를 좋아하는 나로서는, 당연히 가까운 바 배럴을 찾았으나 그게 살짝 실수였다는 걸 너무 늦게 깨달았다. 바를 찾기에 우리는 조금 취해 있었던 것이다.
다행히 배럴엔 아직 손님이 없었지만 술 취한 목소리는 너무 컸고, 나는 평소 같았으면 하지 않을 쓸데 없는 드립을 날리고 말았다. 그러나 돌이키기엔 좀 늦었다. 그저 술을 마시며 목소리가 가라앉기를 기다리는 수 밖에.
"손님은 중년에 옷을 잘 차려 입은 남자로 술에 취해 있었다. 그는 얘기를 하고 싶어했고 얘기를 하고 싶지 않더라도 어떻게 말을 멈출지 모르는 듯 싶었다. 그는 정중했고 친근했으며 내가 그의 말을 듣고 있을 때는 별로 더듬거리지 않는 것 같았으나, 그런 친구는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술병을 쥐고서는 저녁에 잠들 때까지 절대 놓지 않는 법이다. 그는 남은 인생 대부분을 그렇게 보낼 것이고 그게 그의 인생이었다. 그런 친구가 어쩌다 그렇게 됐는지는 결코 알 수 없는데 얘기를 해주더라도 그 말이 진실이 아닐 수도 있기 때문이다. 거짓말이 아니라고 해도 왜곡된 기억만을 간직하고 있다. 세상의 모든 조용한 바에는 그렇게 슬픈 남자가 한 명씩은 있다. "
- 레이먼드 챈들러, 기나긴 이별 중에서, 박현주 옮김, 북하우스
“세상의 모든 조용한 바에는 그렇게 슬픈 남자가 한 명씩은 있다.” 그래서 바에서는 옆 좌석에 방해가 될 정도로 목소리를 키우면 안되는 법이다. 누군가는 슬픈 마음을 달래려 앉아 있고, 누군가는 힘든 하루를 비로소 마감하려 앉아 있으며 누군가는 조용하게 술에 기대고 싶어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바는 술꾼 모두의 것이기 때문이다.
오늘, 나는 좀 부끄러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