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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레이 Feb 19. 2017

잭 로즈 그리고 라 비 앙 로즈

낙성대 벡 바의 잭 로즈는 루이 암스트롱의 라 비 앙 로즈를 닮았다

뭐든 다 그렇지만, 바에 앉아 술을 마실 때도(가뜩이나 혼자 마신다면 더더욱) 호흡이 있어야 한다. 강약을 적당히 조절해야 한다는 말이다. 도수가 꽤 높은 숏 칵테일을 주로 마셨다면 탄산이나 과일이 들어간 롱 칵테일이나 크리미 한 리큐르로 만든 달달하고 부드러운 칵테일을 마실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어차피 주량을 넘으면 취하기는 마찬가지라 뭘 먹어도 상관없기는 하겠으나 술은 입으로 마시는 게 아니다. 술은 머리로 마시고 가슴으로 즐겨야 진정한 제 맛을 알 수 있는 법이다.


바에 앉으면 대개 네 잔에서 다섯 잔 정도를 마시는 나는 둘 아니면 셋째 잔에서 쉬어간다. 요즘은 양이 많아 배가 부른(!) 롱 드링크보다는 숏 드링크를 더 좋아하는 편이고 그러다 보니 내 이미지와는 어울리지 않게 잭 로즈나 스칼렛 오하라 같은 화려한 잔을 주문하곤 한다. 특별한 이유는 없다. 바의 어두운 조명, 적당히 취기 오른 눈으로 보면 이 칵테일들이 마치 미녀처럼 예뻐 보이기 때문일지도.

벡의 잭 로즈. 색깔에 속으면 안된다.

어쩌다 보니 밸런타인데이에 찾아간 낙성대 벡 바에 쉬어가려고 셋째 잔으로 주문한 것도 잭 로즈였다. 인스타 친구 한 분이 벡 바의 잭 로즈를 기가 막히게 찍어 놓은 걸 본 탓도 있었지만 칼바도스와 그레나딘 시럽이 조화를 이루는 잭 로즈는 색깔만큼이나 맛도 마음 놓일 만큼 편안하고 예뻐 쉬어가기엔 그만이다. 등급이 다른 두 종류의 칼바도스와 익숙한 그레나딘 시럽으로 만드는 잭 로즈를 기다리며 어울리지 않게 나는 군침을 삼켰다. 그런데…


벡의 잭 로즈는 만만히 볼 상대가 아니었다. 눈이 부실 정도로 진한 석류 색을 띠고 있었으나 달콤함을 기대했던 내게 입이 화할 정도의 아릿함을 던져 놓은 것이다. 어유, 보기와 달리 콧대가 높은데요!라고 말은 던졌으나 쉬어갈 것을 기대했던 나는 내심 당황했고 당장 다음 잔은 무엇을 마셔야 할지 머리 속이 복잡해지기 시작했다. 원래는 라스트 워드와 브랜디 알렉산더로 마무리할 계획이었는데, 이러면 다음 잔에 대체 뭘 마셔야지?


잭 로즈 위에 왜 마라스키노 체리를 얹었는지 그제야 이해가 됐다. 내가 주저 없이 마성의 체리라 부르는 마라스키노 체리는 힘있는 잭 로즈와 훌륭하게 어울렸고 나는 숨 가쁘게 올라오는 취기와 때마침 벽을 타고 흐르는 루이 암스트롱의 라 비 앙 로즈를 들으며 다음 잔의 고민을 잊어버렸다.


루이 암스트롱 라 비 앙 로즈, 1959

가만 생각해 보니 벡의 잭 로즈는 루이 암스트롱의 라 비 앙 로즈를 닮았다. 장밋빛 잭 로즈는 선율처럼 부드러웠으나 루이 암스트롱의 걸걸한 목소리처럼 진했다. 음악을 잘 모르는 나지만 칵테일과 음악은 기가 막혔고, 다행히 다음 잔도 제대로 골랐다. 밸런타인데이를 싫어하는 내게도 하루가 장밋빛으로 지나가고 있었다. / soolko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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