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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레이 Jun 22. 2017

랏쿄 깁슨, 깁슨의 변신은 무죄

술꾼이 소코에서 랏쿄로 깁슨을 만들어내라고 떼(!)를 쓰다 

나는 마티니를 좋아한다. 하지만 마티니는 좋아한다고 해서 벌컥벌컥 마실 수 있는 술이 아니다. 눈부시도록 화려하고 선명한 데다가 어떤 진과 버무스를 섞고 어떤 필을 하며 어떤 올리브를 넣느냐에 따라 극적으로 맛이 변하는 드라마틱한 칵테일이지만 그만큼 자존심이 센 칵테일이기 때문이다. 준비되지 않은 상태로 입에 댔다가는 다음 잔은 커녕 술자리 전체의 리듬이 깨져 버린다. 그래서 나는 충분히 준비된 날, 층분히 잘 아는 바텐더가 아니면 마티니를 주문하지 않고, 입에 대지도 않는다.


마티니를 몹시 마시고 싶은데 어쩐지 마티니가 두려운 날 나는 깁슨을 찾곤 한다. 물론 깁슨도 마시고 싶다고 성큼성큼 마실 수 있는 칵테일은 아니다. 깁슨에 꼭 필요한 펄 어니언을 갖추고 있는 바가 그리 많지 않기 때문이다. 다들 아시겠지만 마티니와 깁슨은 만드는 방법도 비슷하고 가니시만 빼면 별 차이가 없다. 실제로 라룩스 칵테일 북에서 알려주는 마티니와 깁슨의 레시피는 거의 비슷하다. 


마티니 : 조각 얼음 5~6개 / 진 55ml / 드라이 버무스 15ml / 스터 / 그린 올리브 or 레몬 필

깁슨 : 조각 얼음 5~6개 / 진 50ml / 드라이 버무스 10ml / 스터 / 펄 어니언 


진과 드라이 버무스의 비율이 약간 다르지만 사실 이 비율은 바텐더마다 제각각 레시피가 있으므로 이것이 정답이라고는 할 수 없다. 그래서 아주 단순하게 말하면 진과 드라이 버무스를 섞고 올리브를 넣으면 마티니, 펄 어니언을 넣으면 깁슨이라고 생각해도 큰 무리는 없을 것이다. 그런데 마티니는 마시기 두렵고 깁슨은 마시기 좋다고? 이거 좀 심한 오버 아니야?라고 말하실 수 있겠다. 솔직히 나도 인정한다. 내가 오버장이라는 걸.  


하지만 이름을 뭐라고 붙이던 진과 드라이 버무스를 섞은 잔을 마시고 펄 어니언을 입에 넣는 순간의 감흥은 올리브를 넣거나 물을 마시는 것과 정말 다르다. 펄 어니언의 새콤 시원한 맛이 강한 알코올의 힘을 부드럽게 얼러주는 것이 저절로 느껴지기 때문이다. 이 맛에 길들여지면 깁슨은 당신이 좋아하는 다섯 손가락 안의 칵테일은 되지 못할 지라도 열 손가락 안의 칵테일은 될 것이다. 

차가운 잔 속에 가려 보이지 않으나 럇쿄가 틀림없이 들어 있다, 랏쿄 깁슨 by Soko

처음 방문한 한남동 소코. 오너 바텐더의 솜씨는 익히 알고 있으므로 마티니를 시켜도 괜찮았겠지만 어쩐지 깁슨을 마시고 싶었다. 안타깝게도 펄 어니언이 없어 다음 기회에 준비해드리겠다는 대답을 듣고 포기하고 있다가 소코의 인기 안주인 라멘이 어쩌고저쩌고 얘기를 하던 끝에 락교(라고 흔히 쓰지만 우리말로 염교, 일본어 발음으로는 랏쿄에 가깝다. 소리 나는 대로 쓴다는 외래어 표기법 원칙에 따라 이제부터 랏쿄로 쓴다)  얘기가 나와서, 어랏? 펄 어니언 대신 랏쿄를 넣어보면 어때요? 하는 장난기 어린 발상을 했더니 오너가 괜찮을 것 같다며 냅다 받아주더라. 


그렇게 얻어 마신 랏쿄 깁슨. 처음엔 장난이었지만 사실 꽤 마음에 들었다. 펄 어니언보다 단맛은 약간 적고 새콤한 맛이 더 나서 뭐랄까, 입을 아주 개운하게 해줬기 때문이다(물론 랏쿄의 품질이 균일하다는 가정하에!). 펄 어니언이 없으면 랏쿄를 넣어도 아주 좋겠어요,라고 말을 했으나 일식 다이닝을 하는 소코니까 락교가 있지 다른 바에서 랏쿄나 펄 어니언이나 어차피 따로 준비해야 하는 것은 마찬가지겠거니 하는 생각을 했다.  


랏쿄 깁슨을 마시고 궁금해서 찾아본 결과 펄 어니언이나 랏쿄는 모두 백합과(Liliaceae) 중에서도 파속(Allium)에 속한다고 한다. 식물학에 무지한 처지로 이걸 어떻게 이해해야 할지 잘 모르겠으나, 으아, 얘네들 되게 비슷한 애들인가 봐, 하는 짐작만 하고 혼자 흐뭇해할 따름이다. 


술꾼의 장난을 잘 받아준 바텐더에게 감사를. 약간 오른 술기운과 장난이 통한 흥겨움으로 랏쿄 깁슨의 맛을 스스로 과장했을 수 있으니 술꾼은 아마 조만간 랏쿄 깁슨을 확인(!)하러 한 번 더 바를 찾을지도 모르겠다. 바를 찾는 즐거움이 하나 더 늘었다는 점에서 술꾼은 여전히 흐뭇하다. / soolko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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