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레이 Jul 10. 2017

술꾼의 양조증류아카데미 수강기

술꾼이 증류 수업을 듣고 술꾼 2.0으로 업그레이드하다

뭐든지 알고 나면 인생은 달라지는 법이다. 술도 그렇다. 그냥 무작정 마시는 술과 무엇이든 알고 마시는 술은 차원이 다르다. 취하려고 마셨던 마지못해 마셨던 울고 싶어 마셨던 꼬시려고 마셨던, 술에 대해 무언가 하나씩 배워가면서 먹는 순간 술은 독약에서 명약으로 거듭난다… 이건 뻔한 얘기고, 사실은 술 배우러 가는 모임만큼 즐거운 게 없다. 좋아하는 걸 배우고, 그걸 또 마시고, 수업 끝나고 좋아하는 사람들끼리 또 마시고… (도대체 목적이 뭐람!)

한국양조증류아카데미 1기 기본 과정을 무사히 마쳤다.

그래서 양조증류아카데미 1기를 모집한다는 글을 본 순간, 술꾼의 가슴이 두근거린 건 당연한 일이다. 게다가 그나마 있는 술 관련 수업들이 대부분 평일에 있어 참석하기가 어려운데 양조증류아카데미는 토, 일 주말에 수업이 있고, 심지어는 한국 증류계의 대부(라는 표현은 재미없으니 이제부터 나는 파파라고 부르련다. 그리고 겪어보니 진짜 파파 맞으시다) 이종기 파파님이 원장이지 않은가. 대충 날짜를 확인하고 입금부터했다. 솔직히 고백하건대 나는 커리큘럼은 그 다음에 봤다(자랑은 아니잖아요).  


솔직히 첫 수업부터 강했다. 증류주 개괄부터 시작해서 미생물학, 효모, 기초 생화학, 양조 용수, 곡물 발효, 증류 이론… 이건 완전히 생화학 수업이었다. 원소주기율표를 다 알아야 할 필요는 없지만 양조와 증류에 필요한 원소 기호를 알아야 하고 복잡한 그림들을 멍하니 바라봐야 했다. 그나마도 다행히 선생님들이 쉽게 풀어주는 바람에 조금씩 시간이 지나가면서 조금씩 알아듣긴 했으나 아마추어인 나는 반도 못 알아들었다고 하는 게 정답일 거다. 그러나 기본 원리는 많이 배웠다. 이런 거다.


"효모는 입이 작아서 곡물(탄수화물)을 먹을 수가 없어요. 그래서 효모가 먹을 수 있도록 탄수화물을 잘게 쪼개 줘야 하죠. 그런데 탄수화물은 당이 여러 개 붙은 구조거든요. 이걸 잘라 놓으면 효모가 먹을 수 있는 크기인 당으로 변하는 거죠. 이게 당화예요."


(술꾼이 이해한 대로 쓴 것이므로 내용에 오류가 있다고 해도 그건 아카데미의 책임이 아니다. 내 책임이다)

어려웠지만 신나는 테이스팅. 왜 나는 남들과 입맛이 반대인가.

이론 수업은 어려웠지만 다양한 술을 맛보는 테이스팅 수업은 스트레스받으면서도 신났고(아니, 왜 나는 남들이 맛없다는 것만 맛있다고 고르는 거야!) 업계 현황과 전망 같은 마케팅 분야의 이야기를 들을 땐 금세 알아들을 수 있어 좋았다. 무엇보다도 이종기 파파 님의 리쿼리움과 오미나라를 방문해 실제 증류에 사용하는 오크통과 증류기를 만져보았고 술이 익는 공간에서 술과 함께 호흡할 수 있었으며 술이 잠자는 공간에서 같이 졸기도(!) 했으며 동기들의 도움으로 술을 담그고 증류하는 과정을 직접 겪은 기억은, 술꾼 최고의 경험으로 남을 것이다. 문경의 맛있는 음식들을 맛보고 산세를 즐긴 건 보너스다.

술을 담고 숨쉬는 오크를 쓰다듬는 경험, 통과 함께 눕고 싶었다

동기 중에 증류 업에 종사하는 분들도 있었고 이 분야를 공부하고 싶은 젊은 친구들도 있었고 술을 판매하는 현장에서 일하는 분들도 있다 보니 그야말로 술에 대한 다양한 사람들을 만났다. 게다가 술 좋아하는 사람 치고 나쁜 사람 없다고 어쩌면 다들 그리 경쾌하고 밝고 흥이 넘치던지(아마, 내가 제일 까칠했을 거 같다 ㅜㅜ). 다시 한번 아마추어를 위해 많은 것들을 준비하고 배려해준 증류 선수 동기 분들에게 진심으로 감사를 드린다.

훌륭한 몰트를 제공해 준 동기와 에어콘도 못켜고 숙성시킨 사무국장 덕분에 62도짜리 향긋한 증류주가 탄생했다

증류 이론을 책으로만 볼 수 있었던 내게 양조증류아카데미는 좋은 수업이었다. 수업 마치고 바 투어 한다고 돌아다니면서 마신 술값이랑 교통비 등등이 결국엔 수업료보다 더 나왔지만(!) 증류 이론과 실제를 직접 경험했던 일은 좋은 경험과 기억으로 남았다. 이종기 파파 님을 알게 됐고, 업계 좋은 분들을 만날 수 있었던 것도 행운이다. 게다가 직접 술을 만드는 동기들의 술은, 정말 깜짝 놀랄 정도로 맛있었다. 두루, 봇뜰, 바네하임. 이 술들을 잊지 않을 것이다.


양조증류아카데미 2기를 지원할 분들에게 조언을 한다면.


첫째, 나처럼 아마추어 거나 생화학에 지식이 없다면 기초 생화학 공부는 하고 가라. 장담컨대 수업이 두 배 이상 즐거워질 것이다(만화로 보는 생화학인가 뭔가 책 괜찮다). 가르치는 선생님들은 중학교 때 다 배운 내용이지요? 뭐 이러는데 중학교를 다닌 기억도 가물 한데 생물 수업 내용을 어떻게 기억한단 말인가.


둘째, 수업 끝났다고 혼자 빨리 가지 말고 어슬렁 거려라. 남는 사람들끼리 꼭 저녁 겸 술을 마시러 가더라. 술꾼은 수업 끝나고 신촌, 연남, 홍대 바 투어 한다고 먼저 도망가서 이 모임에 참석하지 못했다. 어쩐지 수업을 거듭할수록 자기들끼리 은근히 끈끈해져 있더라니. 흥.

증류주가 흐르는 이 감동의 순간... (이지만 아마 나는 고기 굽고 먹느라... ^^)

세상만사 다 그렇지만 내가 대하는 만큼 내게 돌아온다. 술도 마찬가지다. 술에 대해 아는 만큼 술을 즐길 수 있고 존중할 수 있고 그로 인해 최고의 기쁨을 얻을 수 있다. 술을 독이 아닌 약으로, 고통이 아닌 즐거움으로 만드는 주체는 바로 나다. 그것을 잊지 않는 순간 술은 최고의 친구가 될 것이다. / soolkoon

작가의 이전글 랏쿄 깁슨, 깁슨의 변신은 무죄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