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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레이 Jul 25. 2017

어떤 시그니처

위로가 조금 더 필요한 날, 술꾼은 시그니처를 주문한다

바를 좋아하고 자주 다니다 보면 누구나 한 번쯤은 이렇게 주문한다.


“이 집에서만 마실 수 있는 칵테일을 주세요.”


정말 넓게 보자면, 세상의 모든 바에서 내는 모든 칵테일은 그 날 그 시간에 그 집에서만 마실 수 있는 것이다. 같은 재료, 같은 레시피라고 해도 마시는 사람의 컨디션, 그 날의 분위기, 바텐더의 상태 등에 따라 맛이 달라지기 때문이다. 뭐, 결국 사람의 입맛은 믿을 게 못 된다는 말이다(물론 천부적으로 절대미각을 타고난 분들도 반드시 있겠지만).


그러나 이런 말을 스스럼없이 한다는 건 내가 만화책을 너무 많이 봤다는 뜻이다. 이런 얼토당토않는 얘기로 여러분의 시간을 빼앗은 점, 사과드려야 하겠다.


어쨌거나 손님이 요청하기도 하고 바텐더도 자기만의 칵테일을 내놓고 싶은 욕구가 있는 것은 당연한 일. 그  요청과 욕구의 결과물을 대게 ‘시그니처’라고 부른다. 그래서 시그니처에는 두 가지 의미가 있을 게다. 바텐더가 제일 자신 있는 칵테일 혹은 다른 곳에서는 마실 수 없는 고유한 칵테일.


어떤 의미에서든 바텐더의 크리에이티브가 들어가는 것이므로 시그니처는 보통 다른 칵테일보다 비싸고 비싼 만큼 바와 바텐더의 자존심이기도 하겠다. 그러니 뭔가 특별하고 색다른 잔을 원할 땐 이 바의 시그니처를 주세요,라고 주문해도 좋겠다. 비용을 조금 더 내는 만큼 특별한 칵테일을 마실 수 있을 테니까.


바인하우스 사장님이 일 년을 준비했다는 칵테일 페리고르를 인스타에 공개한 순간, 그걸 보고 침을 흘린(!) 사람이 나 하나가 아니라는 건 굳이 말할 필요도 없는 얘기다. 아, 죄송. 지저분하게 침 흘린 건 나 하나고 다른 분들은 우아하게 드시고 싶어 했을 게다. ^____^ 그러다가 정말 우연히, 비가 오는 토요일 밤 바인하우스 앞을 지나게 됐다. 미처 영업시간 전이어서 바인하우스 문은 닫혀 있었지만, 나는 이것을 그저 우연이라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이건 페리고르를 마시라는 디오니소스의 계시야,라고 주장하며 사장님에게 문자를 넣고 가게 앞에서 기다렸다. 십 분만 기다렸다 연락 없으면 가야지,라고 생각했는데 진짜 딱 십 분째 답변이 왔다. 그렇게 난 페리고르를 만났다.

페리고르. 조니워커 골드라벨, 트뤼프 누와르 by 바인하우스

조니워커 골드라벨과 검은 트뤼프 주스(라고는 하지만 진액이라고 해야겠다)가 진한 적갈색 액체를 이루고 트뤼프를 얇게 썬 조각에 금을 토핑해 가니시로 장식한 페리고르가 눈 앞에 놓인 순간 가슴이 두근두근 했다. 고소하면서도 기분 좋은 고기 향이 은근 올라왔다. 가니시부터 냅다 입에 넣었고(세상에, 슬라이스 조각일지라도 이건 진짜 트뤼프 누아르잖아!) 칵테일을 한 모금 입에 넣은 순간, 이루 말할 수 없는 쾌감이 몰려왔… (다고는 할 수 없겠어요 ^^).


강렬하거나 짜릿하거나 인상적이거나 깜짝 놀랄 충격을 주지는 않았다. 그러나 페리고르는 그 날처럼 비가 내리는 날 축축하게 젖은 어깨를 털고 따뜻한 불가에 앉아 몸을 녹이는 것 같은 기분 좋은 상상을 하게 만들었다. 비록 현실은 눅눅한 습기에 지쳐 에어컨 바람을 찾는 날이었지만.


추위든 더위든 일이든 사람이든 어떤 이유로든 몹시 지친 어느 날에 한 모금 입에 대면 저절로 위로가 될 것 같은, 페리고르는 그런 잔이었다. 첫 잔 보다는 마지막 잔으로 좋겠다는 생각도 했지만 그러나 이 좋은 잔을 취한 상태에서 마신다는 것 또한 말이 안 되는 일이니, 허겁지겁과 목마름을 해결한 첫 잔에 이어 두 번째 잔 정도면 아주 편하게 마실 수 있을 것 같았다. 대신 가격은 만만치 않으니, 미리 물어보고 마시는 게 좋겠다.  


참고로 시그니처를 비롯해서 메뉴에 없는 칵테일을 주문할 때 가격을 물어보는 건 부끄러운 일이 아니다. 가격도 묻지 않고 주문했다가 계산할 때 당황 혹은 황당해하는 건 손님이나 바텐더 모두에게 난처한 일이다. 술김에 아무렇지 않게 계산했지만 나중에 알고 투덜대는 것도 좋지 않다. 그 기억이 부담스러워 결국 바와 멀어지기 때문이다. 그러니 뭔가 특별하다 싶은 걸 주문하려거든 당당하게 가격을 물어보라.


그러나 사실 가격을 먼저 물어보기란 허세에 흠집 나는 일(!)이라서 쉬운 건 아니다. 그래서 나는 신촌 바코드의 손가락과 머리가 긴 미남 바텐더가 이렇게 말했을 때 은근히 기뻤다.


“저희 칵테일은 얼마에서 얼마 사이인데요, 이걸 넘는 녀석은 미리 말씀드립니다.”


시그니처는 기대감이 큰 탓에 실망하기도 쉬운 칵테일이다. 그래서 난 바텐더를 잘 모르는 곳에서는 시그니처를 주문하지 않는다. 잘 모르는 곳에서 시그니처를 시켰다가 괜한 기대감에 낭패를 본 적이 두어 번 있고, 그런 이유로 발길을 끊은 바도 있기 때문이다.


오늘, 조금 힘든 일이 있었다. 사실 날마다 그만큼의 힘든 일은 있으니, 이건 핑계다. 뻔한 핑계를 대고 술꾼은 아마도 어느 바의 카운터 자리에 앉아 시그니처를 마실 예정이다. 다른 날보다 조금 더 위로가 필요한 날이므로. / ray, the soolko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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