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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레이 Aug 02. 2017

좋아하는 술은 좋은 기억을 남긴다

술의 이름을 기억하라, 흐뭇한 기억이 함께 녹아들 테니

내가 좋아한다고 말한 첫 위스키는 잭 다니엘스였다. 플라스틱 맛(!)이 나는 스카치와 달리 초콜릿 향이 나는 잭 다니엘스는 술이라곤 소주 맥주밖에 모르는 삼십 대 초보 술꾼의 입에 꽤 맛있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콜라와 2:1로 타 마시는 잭콕은 술이란 그저 쓰기만 하다, 라는 선입견을 부셔버린 그야말로 음주의 신세계였다. 그렇게 경험도 없고 돈도 별로 없던 젊은 시절, 잭 다니엘스는 허세를 부릴 수 있는 가장 호사스러운 술이었다. 오죽하면 젊은 시절의 내 블로그엔 아직도 잭 다니엘스 예찬이 남아 있고 아마도 2003년의 나는 잭 다니엘스를 이렇게 칭송하기까지 했다.


“마시기 전 올라오는 진한 초콜릿 향이 정신을 혼미하게 했다. 혼미한 정신을 차리기도 전에 첫 잔은 꺾지 않는다는 소신을 가지고 있는 나는 조심성 없이 첫 잔을 그대로 입에 부었고 목구멍을 지지는 듯한 기분 좋은 통증을 느끼게 됐다. 오, 이거 장난 아닌데, 하는 감탄이 절로 우러나왔다.”


“(과하게 마시면 다음 날 나를 힘들게 하지만) 그럼에도 잭을 좋아하는 건, 강렬한 그 향취 때문일 게다. 그렇게 변하지 않는 강렬하면서도 은은한 향취를 가진 사람이 되고픈 지도 모르겠다.”


(솔직히 조금 고쳤는데도) 이 무슨 오글거리는 문장인가(지금 쓰는 이 글들도 십 년 뒤에 보면 또 얼마나 오글거릴 것인가 ㅜㅜ). 그러나 그 강렬한 향취도 사람의 변덕을 이길 수는 없었다. 세월이 흘러 입맛도 변하고 취향도 변해버린 나는 한때 싱글 배럴까지 찾아다니며 마실 정도로 좋아했던 잭 다니엘스를 거의 잊고 살았다. 그 사이 강렬하면서도 은은한 향취를 가진 사람이 되고 싶었던 삼십 대 청년은 은은한 향취는커녕 퀴퀴한 아저씨 냄새가 날까 걱정하는 중년이 되어 버렸다.


여름의 정점이던 어느 날, 무더운 날씨를 피해 몸을 던지다시피 달려들어간 텐더에서 하이볼 한 잔을 해치운 나는, 마치 이제야 찬찬히 술을 마실 수 있게 됐다는 듯 거드름을 부리며 “두 번째로는 좀 진한 걸 주세요.”라고 요청했다. 긴 시간을 고민하던 바텐더는 “혹시 싫어하실 수도 있겠는데…” 라면서도 “잭 다니엘스를 록으로 드시면 어떨까요?”라는 희한한 제안을 해왔다. “잭 다니엘스요?” 되묻고 나는 잠깐 고민에 빠졌다.


사실 내가 “진한 것”을 던지면서 기대한 것은 맨해튼 류의 술이었다. 진한 컬러와 밀도 있는 식감, 식도를 찔러 오는 알코올 도수… 맨해튼을 직접 주문하지 않는 건 맨해튼과 비슷하지만 뭔가 좀 색다른 술을 마셔보고 싶었기 때문이었다('그럼 맨해튼하고 비슷한 거 주세요,라고 주문하면 되잖아! 이 무슨!'이라고 외치는 목소리가 들린다). 그런데 (어쨌든 아메리칸 위스키를 맞추기는 했으나) 잭 다니엘스라니!


그러나 재미있을 것 같았다. 게다가 술과 바텐딩에 대한 고집이 명확한 이 바텐더가 그냥 내어줄 것 같지도 않았다. 그랬다. 글라스에 얼음을 골라 담고 스터 하고, 녹은 물을 따라 내고 술을 붓고, 또다시 정성 들여 스터한 잔을 내어주면서 바텐더는 스터가 술에 미치는 영향을 확인해보라고 했다. 미각이 무딘 나는 그가 말한 대로 느끼지는 못했지만 얼음을 타고 흐르는 잭 다니엘스는 내가 기대하고 또 기억하는 것보다 훨씬 부드럽게 다가왔다. 알코올의 거칠고 강한 맛은 날아가고 예쁘고 달달한 향기가 쫓아 올라왔던 것이다.

젊은 시절의 술 마시던 날이 기억났다, 잭 다니엘스 록스 by 서울텐더

솔직히 나는 스터로 인해 술맛이 달라지는 걸 알아챌 만큼 섬세한 미각은 없다. 그날 그날의 기분대로 느끼고 마시고 즐기고 취할 뿐이다. 그러니 질감이 우아해졌다거나 예쁘고 달달한 향기가 났다는 건 내 느낌이고, 착각이고, 주장일 뿐이니 그대로 믿으면 안 된다. 미각과 느낌은 결국 마시는 사람의 것이므로.


아마도 젊은 시절의 내가 잭 다니엘스를 마시지 않았더라면 스터한 잭 다니엘스를 마시지 않았을 게다. 그래서 젊을 때 즐겨 마시는, 때론 처음으로 마시는, 혹은 또 다른 어떤 이유를 대고 마시는 술이 중요하다. 술과 함께 젊음이, 처음의 설렘이, 술을 마셨던 그 이유가 기억에 남기 때문이다.


얼마 전 만난 젊은 친구가 “젊은 시절에 마신 맥주가 기억에 평생 남을 것 같다.”는 얘기를 하길래 “사랑도 3년이면 변하는데 무슨 맥주가 평생 남겠나.”라는 꼰대스러운 발언을 했는데, 반성한다. "정말 미안합니다." 그러니 술꾼들이여, 마실 수 있을 때 핑계를 만들어 즐겨 마셔라. 술과 함께 흘러든 기억들이 여러분의 미래에 회상이란 아름다운 소일거리를 만들어 줄 터이니. / ray, the soolko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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