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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레이 Jan 22. 2018

글렌피딕과 그리운 맛

먹먹함도 맨들 맨들한 지금, 그때와 다른 글렌피딕을 마신다

싱글몰트가 뭔지도 몰랐던 시절에도 그 이름을 알고 있었던 유일한 싱글몰트. 글렌피딕에선 그리운 맛이 났다. 이름에 익숙해서일까. 하지만 그리운 맛이 난 건 그저 이름에 익숙해서가 아니라는 사실을 나는 알고 있었다.


애주가라기보다 하루의 고된 일과를 술로 달래는 생존형 음주가였던 아버지는 내가 스무 살 후반 무렵, 외국 다녀오는 길에 사 왔던 글렌피딕 21을 몹시도 애지중지했었다. 찬장 제일 깊은 곳에 숨겨둔 이 친구를 볼 때마다, “도대체 저거 언제 드실 거예요?”라고 웃으며 채근해 보지만 “좋은 일 생기면 마셔야지.” 하며 아버지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당시의 나는 위스키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던 터라 더는 조르지도 않았고 그 덕에 글렌피딕 21은 다행히(!) 무사할 수 있었다.


위스키를 제대로 배우기 시작한 건, 아버지의 1주기 되는 날이었다. 추도를 마친 저녁, 바를 찾아 슬픈 날 마시는 술을 달라 했고 내가 위스키를 마시지 않는다는 걸 알면서도 바텐더는 내게 위스키 한 잔을 권했다. 그렇게 나는 위스키를 알았으나 그러고도 얼마가 지나서야 비로소 아버지가 아껴둔 글렌피딕에 손을 댈 수 있었다.


예상대로 뚜껑을 여는 순간 코르크는 다 부서졌고 남은 코르크 조각은 병 안으로 밀어 넣어야 했다. 이걸 어쩌지, 머리를 쓴 끝에 커피 필터로 위스키를 걸러냈다. 잘 했구나, 스스로 뿌듯해진 나는 병 안의 위스키는 더 이상 숙성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뭔가 기대에 찬 채 거른 위스키를 글라스에 따랐다. (병 안에 있거나 말거나) ‘그러니까 이게 21년 산인 데다가 병 안에 16년쯤 있었으니 적어도 37년은 묵은 거잖아? 진하겠는 걸?’


그러나 한 모금 마시는 순간, ‘뭐야? 왜 이렇게 위스키가 맨들맨들해? 마치 물 같잖아?’ 하고 허세가 튀어나왔다. 불 같이 독하리라는 예상은 온데간데없고 매끈하게 식도를 넘어 위로 들어갔던 것이다(물론 김(!)이 다 빠져서 그랬을 수도 있겠습니다, 그려). “이 좋은 걸 왜 아끼셨대.” 소리가 절로 나왔고 나는 조금 먹먹해졌다.


익숙하다는 건 어떤 면에선 손해를 보는 법이다, 익숙한 싱글몰트 글렌피딕

아마도 그 먹먹함이 생각날까 두려워 그동안 나는 글렌피딕을 피했었나 보다. 어쩌면 그 이름에 너무 익숙해서, 그거 말고 다른 위스키를 먼저 찾았을 수도 있겠다. 너무 익숙하다는 건 어떤 면에선 손해를 보는 법이니까. 그러다가 18년 산 위스키를 찾아 마시기로 작정한 2018년 1월의 어느 토요일, 바에 앉은 내 앞에 글렌피딕 18이 놓였다. 먹먹함을 기억할 틈도 없이 향을 맡고 한 모금을 머금었다.


먹먹함도 맨들 맨들 해진 지금, 그때와 다른 글렌피딕을 마셨다. 편안하고, 부드럽고, 그리웠다. / ray, the soolkoon


#글렌피딕 #glenfiddich #위스키 #싱글몰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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