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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레이 Jun 17. 2019

따라 시키는 즐거움

차가운새벽에서 다른 손님의 주문을 따라 시키고 불 맛을 경험하다

따라 한다는 건 편하고도 즐거운 일이다. 굳이 고민할 필요가 없으니까. 뭘 먹을까 뭘 마실까 고민하는 곳에선 더 그렇다. ‘나도 그거.’ 한 마디면 해방된다. 아, 신나라. 이제 먹고 마시면 된다.


심야식당처럼 디귿자 형 카운터가 있는 곳이라면 이런 일은 더 자주 일어난다. 마스터의 말과 행동이 모든 손님에게 노출되니까 누군가 주문하고 마스터가 응대하는 걸 보면 끌릴 수밖에. 게다가 손님들이 마주 보고 있어 차라리 더 당당하게 따라 할 수 있다. ‘저도 그거요.’ 하고는 씩 한 번 웃으면 된다. 속삭이듯 ‘저 옆 손님들 먹는 거 뭐예요? 그거 주세요…’ 하는 것보다는 훨씬 당당하다.


디귿자 카운터의 마력에 걸려들다


디귿자 모양으로 바꾼 차가운새벽에서도 똑같은 일이 일어났다. 한 손님이 압생트를 마시고 싶어 했고 바텐더는  니트로 마시기 좋은 압생트를 추천했다. 바텐더가 얌전히 술만 따랐을 리가 없다. ‘이 스위스산 압생트에는 좋은 허브가 어짜구 저짜구…’ 아주 찰지게 설명을 붙인 것이다. 당연히 바에 있는 모든 사람이 그 설명을 들었고 가장 용기(!) 있는 손님이 ‘저도 그거 주세요.’를 외치는 순간 바에는 웃음과 함께 주문의 파도타기가 일었다.


사실 나는 이 72도짜리 압생트를 마시면 안 됐다. 차가운새벽에서 이어 진주도가로 넘어갈 계획이었으니까. 요즘 내 컨디션으로 보아 1차에서 너무 센 알코올을 마시면 2차를 제대로 즐길 수가 없다. 하지만 디귿자 카운터의 마력을 피할 수 없었다. “저도 마지막 잔으로 그거 마실래요.” 혹시라도 모자랄까봐 내 거 남겨놓으란 뜻이었다.


하지만 마지막까지 참지 못했다. 올드패션드, 애비에이션에 이어 덜컥 세 번째 잔으로 압생트를 주문해 버린 것이다. ‘이거 드시면 마지막에 어떤 술을 마셔도 감흥이 없을 텐데 괜찮으시겠어요…’는 바텐더의 질문에는 이렇게 말했다. “마지막 잔으로 엄청 단 걸 먹을 거예요.” “아하, 그럼 되죠.”


노징 글라스를 챙기는 바텐더에게 온더락스 글라스에 내달라고 했다. 요즘 나는 니트로 마실 땐 온더락스 글라스를 주문하고 코를 아예 밀어 넣고 킁킁거리며 향을 맡는 걸 좋아한다. 향이 분산되는 것을 우려한 바텐더가 스니프터 글라스를 제안했으나 온더락스 글라스에 달라고 고집을 부렸다. 근데 이 분도 여기서 물러날 기색이 아니었다. 이름을 듣곤 곧바로(!) 까먹었지만 독일에서 만들었다는, 다른 온더락스 글라스보다 길고 묵직한 녀석을 꺼내온 것이다. ‘참내, 내가 졌소이다.’  

샷 글라스로 보이지만 엄연히 온더락스 글라스다

한 모금 마시고 자세를 고쳐 잡다


호기롭게 한 모금을 들이켰다. 헉, 72도는 역시 만만하게 봐선 안됐다. 달달한 척하다가 이내 입을 지지는 것 같은 느낌에 화들짝 놀란 나는 금세 무릎을 붙이고 겸손하게(!) 자세를 고쳐 앉은 후 마치 바르듯이 찔끔찔끔 흘려가며 마셨다. 아니스 향과 복잡한 허브 향이 입 안을 뱅뱅 돈 후 목을 타고 사라졌다가 다시 올라와 코를 들쑤셨다. 알코올과 향이 동시에 정신없이 밀고 올라오니 정신이 번쩍 뜬다. 허세를 떠느라 체이서도 없이 마셨는데 아무래도 안 되겠어서 클럽 소다를 부탁했다.


불같은 한 모금을 삼키고 호흡을 가다듬다가 견디기 힘든 역공이 시작되면 슬쩍 탄산수를 밀어 넣었다. 하지만 임시방편. 72도 압생트가 그리 쉽게 물러나겠는가. 내 입과 코 속에선 전쟁이 났지만 나는 안 그런 척, 괜찮은 척, 몹시도 술이 센 척, 조용히 글라스를 돌려대었다. (힘들었어요 ^^)


이 녀석의 이름은 Kübler 2017 빈티지. 허브가 좋은 나라 스위스에서 태어나 진득한 허브 풍미가 매력이라고 바텐더가 설명했다. 압생트가 탄생했다고 알려진 스위스 발-드-뜨하베흐 지역에서 증류한 녀석이라고 위키 선생이 가르쳐 준다. 내 상식으로는 ‘퀴블러’라고 읽어야 할 것 같은데 유튜브에서 아무리 귀를 열고 들어도 ‘큐블랑’처럼 들린다. 아이참, 나도 몰랑.


따라 시키는 건 이런 재미가 있다. 정체를 모르고 시켜 혼쭐이 나기도 하지만 그 덕에 새로운 걸 경험해보니 말이다. 처음 압생트를 주문한 손님, 용기 있게 따라 시킨 손님이 아니었다면 이름도 모르고 지나갔을 텐데. (고맙습니다. 꾸벅).


그나저나 달게 마신 마지막 잔은 무엇이었냐고? 그래스호퍼를 주문했고 그래스호퍼 오텀 버전을 받았다. 젯 페퍼민트와 모차르트 초콜릿의 조화. 재료의 이름만 들어도 단 맛은 넘치고 충분했다(그래스호퍼 섬머 버전은 없나?). 덕분에 술꾼은 추가로 한 잔을 더 마시고… 으응?? / ray, the soolkoon

그래스호퍼 오텀. 가을에 마시면 더 좋을까... 더 좋다.

#차가운새벽 #압생트 #칵테일 #바 #바텐더 #그래스호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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