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페이지 IR 자료로 VC 미팅 망한
투자 받으려다 쪽팔림만 당한 첫 미팅
VC 심사역과의 첫 미팅이 성사된 것은 2018년 1월이었다.
투자를 유치하려면 먼저 VC의 심사역을 만나야 한다.
VC 심사역을 만나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지만,
당시 나는 디캠프에서 진행하는 '오피스아워' 프로그램을 통해 처음으로 VC 심사역을 만났다.
디캠프(https://dcamp.kr)의 '오피스아워'는 VC 등과 멘토링을 주선해주는 프로그램이다.
만나고 싶은 심사역을 선택해서 IR 자료 혹은 사업계획서를 첨부하여 신청하면,
심사를 거쳐 선정 여부를 알려준다.
명목상 멘토링이지만 나를 비롯해 대부분은 심사역을 만나면
멘토링보다는 투자 검토를 요청할 목적으로 미팅을 신청했을 것이다.
심사역들 역시 투자 대상을 효과적으로 찾기 위한 용도로 이 프로그램을 활용할 테니
서로에게 윈윈인 셈이다.
나는 지금은 카카오의 대표로 내정되었지만
당시에는 카카오벤처스의 대표였던 정신아 대표에게 멘토링을 신청했다.
하지만 멘토링 대상자로 선정되지 못했다는 메일을 받았다.
선정되지 못한 이유는 게임이나 콘텐츠 쪽은 정신아 대표가 담당하는 분야가 아니라는 것이었다.
투자 유치를 잘 모를 때는 나처럼 VC 심사역이라면 누구나 만나려는 시도를 할 수 있다.
하지만 VC 심사역들은 자신이 담당하고 있는 전문 분야가 있다.
따라서 무턱대고 미팅을 신청하면 당연히 거절당할 가능성이 높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신아 대표는 감사하게도
카카오벤처스 내에서 게임을 담당하고 있는 심사역에게 메일을 보내
해당 심사역과의 미팅이 이뤄지도록 해주셨다.
그냥 넘길 수도 있는 일이었는데 신경을 써주신 것에 대해 지금도 감사하게 생각한다.
이를 통해 나는 카카오벤처스의 게임 분야 담당 심사역과 첫 미팅을 가질 수 있었다.
나는 당시 투자 유치를 준비하면서 다소 엉뚱한 접근을 하고 있었다.
야구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스캇 보라스라는 악명높은 에이전트에 대한
이야기를 한번쯤 들어봤을 것이다.
(구단 입장에서 그렇다는 것이지 선수들 입장에서는 최고의 에이전트라고 할 수 있다.)
메이저리그 124승에 빛나는 박찬호 투수의 에이전트가 바로 이 스캇 보라스였다.
그가 생애 첫 FA 자격을 얻게 되었을 때 스캇 보라스는
메이저리그 구단과의 협상에서 최대한 좋은 계약을 이끌어내기 위해
백 페이지가 넘는 분석보고서를 작성하여 메이저리그 구단들에게 제시했다는 일화가 있었다.
나는 이 일화를 보고 우리 회사의 소개서를 최대한 자세하게 작성하겠다고 마음먹었다.
그래서 나는 백 페이지까지는 아니지만 워드로 5~60페이지를 빼곡히 채운 IR 자료를 만들었다.
적어도 이렇게 많은 양을 열심히 정리한 정성을 이해해줄 것이라 믿었다.
그리고 게임 개발사이다 보니 현재 준비하고 있는 게임이
투자 유치의 성패에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할 것이라 생각하고
게임 소개서 역시 정성스럽게 준비했다.
정신아 대표의 도움으로 미팅 일정이 잡혔고,
내가 직접 카카오벤처스를 방문하는 것이었다.
카카오벤처스는 판교에 있었고 우리 회사는 마포구 상암동에 있었기 때문에
나는 직접 차를 몰고 1시간 30분 이상을 운전해서 카카오벤처스에 도착했다.
1월이었기 때문에 꽤 추운 날씨였다.
드디어 심사역과 마주하고 노트북을 꺼내 화면에 준비한 자료를 띄웠다.
하지만 워드로 5~60페이지에 달하는 IR 자료로 회사를 소개하기에는 내가 생각하기에도 부적절했다.
그래서 나는 얼른 파워포인트로 작성한 게임소개서를 화면에 띄우고 소개를 시작했다.
하지만 이내 심사역의 반응이 이상하다는 것을 감지하게 됐다.
심사역은 내 이야기를 경청할 생각이 없어 보였고,
그의 표정은 '이건 미팅을 진행할 가치도 없겠다'는 식의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열심히 설명을 이어 나갔지만,
얼마 가지 않아 심사역은 나의 이야기를 끊으며 말했다.
"나는 당신 회사의 게임 소개를 듣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투자 검토를 하려면 당신 회사와 비즈니스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싶은 것이다.
이런 자료는 게임 퍼블리셔랑 논의할 때나 필요할 것이다."
나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반응에 무척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결국 나는 회사에 대한 소개도 게임에 대한 소개도
어느 것도 제대로 하지 못한 채 미팅을 마무리해야 했다.
미팅을 마치고 나가려는 찰나에 나는 한 번 더 당혹스러운 상황을 맞이해야 했다.
심사역은 우리 팀 인력들에 대한 레퍼런스도 체크를 해봤는데 아는 사람이 없었다고 했다.
그는 미팅을 하기 전에 우리 팀에 대한 사전 조사까지 한 모양이었다.
나는 우리 팀의 경력이 우수하다고 어필했었는데,
막상 심사역이 레퍼런스 체크를 위해 수소문을 해봤으나
평판 확인은 커녕 아무런 정보도 얻지 못했던 모양이다.
나는 속으로 "당신의 인맥이 좁은 거겠지"라고 생각했지만,
그 말을 입 밖에 낼 수는 없었다.
어쨌든 나는 애써 태연한 척하며 정중하게 인사를 하고 미팅 장소를 나왔다.
미팅 장소에서 나옴과 동시에 나는 당혹감과 모멸감으로 정신이 반쯤 나간 상태가 되었다.
짧은 미팅을 마치고 다시 1시간 30분 이상 차를 몰아 사무실로 돌아올 때의 착잡했던 기분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투자를 유치하기 위해 계속 돌아다니다 보면 이전에 만났던 심사역들을 다시 마주칠 일이 많다.
훗날 투자 유치에 성공하고 이 심사역과 다시 대면할 일이 있었는데,
나는 이때의 이야기를 꺼냈고 그 심사역도 그때 일이 인상적이었는지 기억하고 있었다.
심사역은 그때의 일을 머쓱해하며 덕담을 건넸고,
내가 생각해도 심사역 입장에서 그때의 내 모습이 얼마나 우스웠을까 생각하며 같이 웃었다.
이때 일로 내가 알게 된 것은 심사역과의 한정된 미팅 시간 안에서
핵심만을 일목요연하게 전달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자세한 내용은 상대방이 진정으로 관심이 생긴 후에 전달해도 된다.
그 전에는 우리 회사가 어떤 이유로 투자 가치가 있는지를 간결하고 분명하게 제시할 수 있어야 한다.
그래서 보통 투자자를 대상으로 한 IR 자료는 파워포인트 기준 10~20페이지 내외로 핵심 내용 위주로
간결하게 작성하는 것이 좋다.
엘리베이터 피치라는 것이 있다.
투자자와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가는 동안의 짧은 시간 안에 회사와 비즈니스, 투자 가치 등을
소개할 수 있도록 간결하면서도 임팩트 있게 전달할 수 있도록 준비되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 측면에서 나는 그 심사역이 보기에는 기본도 안 되어있는 상태로 보였을 것이다.
여하튼 VC와의 첫 미팅은 마치 첫 소개팅을 나가 실수만 연발하고 하고 싶은 말도 제대로 못한 채
서둘러 마무리된 것 같은 그런 느낌으로 끝났다.
첫 VC 미팅에서 얻은 교훈
이 뼈아픈 경험을 통해 얻은 교훈들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1. 투자자는 사업이 아닌 전체를 본다.
게임 개발사라고 해서 게임 자체에만 집중하면 안 된다.
투자자가 보고 싶어 하는 것은 게임의 재미가 아니라
그 게임으로 어떻게 수익을 만들고 회사를 성장시킬 것인지에 대한
전반적인 비즈니스 모델이다.
2. 심사역의 전문 분야를 파악하라
VC 심사역들은 각자 전문 분야가 있다.
무작정 유명한 심사역에게 접근하기보다는
우리 사업과 관련된 분야를 담당하는 심사역을 찾아
미팅을 요청하는 것이 효율적이다.
3. 간결함이 곧 전문성이다.
정성을 보여주려고 50-60페이지의 방대한 자료를 준비했지만, 오히려 역효과였다.
투자자는 바쁜 사람들이다.
핵심만을 간결하게 전달할 수 있는 능력이야말로 진짜 전문성이다.
엘리베이터 피치처럼 짧은 시간 안에 핵심 가치를 전달할 수 있도록 준비해야 한다.
4. 평판 관리의 중요성
투자자는 기본적으로 창업자를 비롯하여 팀원들의 레퍼런스를 체크한다.
평판 관리에 신경을 쓰는 것이 좋다.
물론 우리처럼 존재감이 없어서 투자자가 레퍼런스 체크를 해도
확인하지 못하는 경우도 많을 것이다.
최소한 업계에 악명을 떨치지는 말아야 할 것이다.
5. 실패도 자산이 된다.
당시에는 모멸감과 좌절감만 느꼈지만,
이 경험이 이후 투자 유치 과정에서 큰 도움이 되었다.
실패를 통해 배우는 것이 때로는 성공보다 더 값진 자산이 될 수 있다.
다만 모든 창업자가 이런 시행착오를 굳이 겪을 필요는 없다.
이 글을 읽는 예비 창업자들이 나와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기를 바란다.
필자는 크몽을 통해 투자 유치에 대한 컨설팅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다.
전문적인 도움이 필요하다면 아래의 링크를 통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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