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억 원 투자 결정에 걸린 시간, 단 3시간 40분
당신이 만약 적게는 수억 원에서 많게는 수십억 원의 투자를 한다고 한다면,
그 결정을 위해 과연 얼마 동안 고민할 것 같은가?
아마 대부분은 상당히 오랜 시간 동안 고민하고 또 고민하지 않을까?
하지만 나의 첫 투자 유치 과정, 그리고 그 이후의 투자 유치 과정을 더듬어보면
VC가 투자를 결정하는 데 있어서 그렇게 오랜 시간을 들이지 않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지난 장에서 넥스트라이즈에 참가했다가
예정에도 없던 투자 심사역과의 미팅이 성사되는 행운이 있었다고 얘기했었다.
그리고 그 심사역은 미팅 내내 까칠한 태도를 보였기에
나는 이번 미팅도 별다른 소득 없이 끝나겠구나 하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최선을 다했다.
그런데 미팅을 마칠 무렵 그 심사역이 우리 회사를 방문하겠다는 얘기를 꺼내는 것이 아닌가?
투자를 유치한 후 깨달은 것들이 몇 가지 있는데,
그중 하나는 심사역이 진짜 관심이 있을 때는 회사를 직접 방문하려 한다는 것이었다.
그전까지는 내가 직접 VC를 방문하거나
각종 프로그램의 주선으로 제3의 장소에서 미팅을 진행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간혹 미팅 이후 우리 회사를 방문하겠다고 말하는 심사역들이 있긴 했지만
말만 그렇게 하고 실제로 회사를 방문하는 경우는 이 당시까지는 없었다.
하지만 이 심사역은 그 자리에서 바로 방문 일정을 정하기까지 했다.
나는 심사역의 태도와 실제 행동이 일치하지 않아 다소 얼떨떨한 기분이었다.
그리고 그전에 심사역들과 미팅을 진행하고 나서 잔뜩 기대했다가 실망한 적이 많았다 보니,
방문을 하겠다고 해도 특별히 기대를 갖거나 하진 않았다.
어쨌든 미팅 후 그 심사역은 약속한 일정에 우리 회사를 방문했다.
큰 기대를 갖진 않았지만 그래도 심사역이 직접 회사를 방문했으니,
현재 개발하고 있는 게임과 함께 각종 준비한 자료들을 펼쳐 보이며 열심히 설명을 했다.
그날 심사역과는 거의 3시간 정도 미팅을 진행한 것 같다.
이것도 매우 이례적인 일이었다.
지금까지는 보통 심사역과 미팅을 진행해도 20~30분 정도 진행하거나
길어도 한 시간을 넘기지 않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그런데 무려 3시간이나 미팅을 진행한 것이다.
그 심사역은 그뿐만 아니라 우리를 깜짝 놀라게 했는데,
이 미팅에서 바로 투자 제안을 한 것이었다.
보통 미팅을 마치고 나면 심사역들은 모두 한결같이 회사로 돌아가서 검토한 후
연락을 드리겠다는 식으로 얘기하지, 그 자리에서 결론을 내버리는 경우는 없었다.
그리고 돌아가서 실제 연락을 주는 경우도 거의 없었다.
극히 일부만이 정중하게 투자를 하기 어렵다는 답변을 줬을 뿐이다.
그런데 이 심사역은 미팅에서 바로 투자 조건을 제시하고
조건을 수락한다면 투자를 하겠다고 해버리니,
우리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전개에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예상하지 못한 투자 제안에 놀라기도 했지만,
투자 조건이 생각했던 것과 큰 차이가 있어 놀라기도 했다.
투자를 유치하기 위해 돌아다니다 보면
투자를 받으려는 다른 스타트업들의 IR도 많이 보게 되기 마련이다.
창업한 지 얼마되지도 않은 스타트업들이 기업가치 100억 원을 제시하고
수십억 원의 투자를 희망하는 것을 보면서
나는 순진하게 나 역시도 저 정도를 불러도 되나 보다 생각했었다.
그런데 막상 심사역이 생각하는 우리의 기업 가치와 투자 가능 금액은
내가 기대했던 것의 1/2, 1/3 수준에 불과했다.
그리고 심사역은 그 조건을 받아들일 수 없다면 투자를 할 수 없다는 의사를 분명히 했다.
협상의 여지도 없었고 이 VC를 제외하면 다른 대안도 없었다.
당시에 한 엔젤클럽이 우리에게 투자를 검토하고 있긴 했지만
별다른 피드백이 없어 거의 기대를 하지 않고 있었다.
그리고 투자를 받지 않으면 오래 갈 수 없는 상태였기 때문에
우리도 그 자리에서 조건을 수락했다.
투자 조건은 기대를 크게 하회하긴 했지만, 일단 투자 유치의 첫 관문을 넘는 게 중요했다.
다만 투자가 실제 이뤄지려면 이후에 있을 IR과 투심을 통과해야 하는데,
나는 본인만 결정한다고 투자가 되는 것인가 다소 의아해하기는 했다.
그런데 투자를 하겠다고 하니 본인이 결정만 하면 IR과 투심도 핸들링할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인지,
아니면 우리가 충분히 후속 과정을 통과할 수 있다고 본 것인지 어느 쪽인지는 잘 모르겠다.
어쨌든 그 뒤로는 모든 일이 술술 풀리기 시작했다.
VC가 투자를 결정했다고 하니 그때까지 미온적이던 엔젤클럽도 투자를 하겠다고 나왔다.
그러나 여러 사정 때문에 엔젤클럽의 투자를 받지는 않았다.
대신 그 심사역은 다른 투자사를 끌어들여 같이 투자하게 했다.
그래서 우리는 최종적으로 두 투자사의 투자금을 합쳐 총 5.5억 원의 투자를 받게 되었다.
게다가 그 투자사는 TIPS 운영사였다.
TIPS는 민간과 정부가 합작하여 스타트업을 지원하는 프로그램인데,
TIPS 운용사가 투자한 기업들만을 대상으로 심사하여 정부지원금을 주는 프로그램이다.
이 프로그램에 선정되면 당시 2년에 걸쳐 최대 7억 원의 지원금을 받을 수 있었다.
따라서 투자금 5.5억 원에 TIPS 지원금 7억 원을 합하면
최대 12.5억 원의 자금을 확보할 수 있는 것이었다.
다만 TIPS는 다음 해에 지원할 수 있었기 때문에 당장 확보할 수 있는 금액은 아니었다.
그래서 나는 곧바로 한국콘텐츠진흥원의 문화콘텐츠보증을 신청했다.
문화콘텐츠보증은 한국콘텐츠진흥원과 신용보증기금이 게임이나 애니메이션 등을
제작하는 콘텐츠 기업을 심사해서 요건을 통과하면 직접 보증을 서서 금융기관으로부터
대출을 받을 수 있게 해주는 프로그램이다.
https://www.kocca.kr/kocca/bbs/list/B0158960.do?menuNo=204392
이 프로그램을 통해 3억 원의 대출을 받을 수 있었고,
투자와 대출을 합치면 총 8.5억 원의 자금을 확보할 수 있었다.
최초에 기대했던 투자금액이 5~10억 원이었는데,
결과적으로 얼추 비슷하게 확보를 하게 된 셈이다.
나중에 돌이켜보니 투자가 결정되는 데 불과 3시간 40분밖에 걸리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 심사역은 나와 약 40분간의 첫 미팅과 회사를 방문해서 가진 3시간 정도의 미팅을 가지고
투자를 결정한 것이다.
물론 첫 미팅과 2번째 미팅 사이에 우리에 대해 조사를 하고 고민했을 수도 있다.
하지만 내가 생각하기에 우리는 외부에 거의 알려져 있지도 않았고,
조사를 한다고 해서 뭔가를 더 알아낼 수 있는 그런 것이 없었다.
그러니 그 심사역은 단 3시간 40분의 미팅과 그동안 쌓은 본인의 경험과 촉으로 결정을 내린 것이다.
수억 원의 투자를 결정하는 데 3시간 40분밖에 걸리지 않는다는 사실이 신기하기도 했지만,
한편으로 곰곰이 생각해보면 충분히 납득이 가기도 했다.
사업을 하는 사람이라면 다 알 것이다.
어떤 중요한 사안들을 결정하는 데 있어 충분히 고민할 시간이 주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말이다.
직원을 채용하는 일을 생각해보자.
투자 유치에 비하면 사소한 일처럼 생각될 수도 있지만, 직원을 뽑는 것은 정말 중요한 일이다.
잘 뽑은 직원 1명이 회사에 큰 기회를 만들어 주기도 하고,
반대로 회사를 큰 위기에 몰아넣을 수도 있다.
실례로 직원 1명이 SNS에 이상한 글을 올리는 바람에 큰 곤경에 처했던 회사들을 떠올려보라.
하지만 우리가 직원을 채용할 때 그 직원을 오래 충분히 관찰하고 뽑을 수 없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스타트업의 경우 일손이 급해서 직원을 채용하는데, 그런 상황에서 직원을 느긋하게 뽑을 수가 없다.
또 뛰어난 직원이라고 한다면 우리뿐만 아니라 다른 회사들도 좋게 볼 것이므로 머뭇거리면
다른 회사들에게 빼앗기게 될 것이다.
그래서 보통 직원이 지원할 때 제출한 이력서와 한 번의 면접만으로
채용 여부를 빠르게 결정해야 한다.
투자의 경우도 비슷할 것이다.
VC들은 못해도 수백억 원대의 펀드를 운용하면서 다수의 기업에 투자를 해야 한다.
신중해야 하지만 그렇다고 한 회사를 느긋하게 오랫동안 관찰하면서 투자 여부를 결정할 수는 없을 것이다.
뛰어난 직원처럼 유망한 투자처라면 경쟁이 붙을 것이고,
한두 개의 기업에만 투자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가능한 빠르게
투자 여부를 결정해야 되는 상황이 많을 것이다.
이번 투자금액이 비교적 작은 금액이라서 그랬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후에 있었던 수십억 원 규모의 투자 때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여하튼 첫 투자를 유치하기까지 1년 9개월이 걸렸는데,
막상 심사역이 투자를 결심하는 데 걸린 시간이 고작 3시간 40분이었다고 생각하니
기분이 묘하고 살짝 허탈한 기분이 들었다.
이 장을 마무리하고자 한다.
사업을 해보신 분이라면 다 공감할 것이다.
될 일은 비교적 빠르게 이뤄지고,
안 될 일은 모든 과정이 지지부진하게 진행되다가
결국 애만 잔뜩 태우고 성사되지 않는 경우가 많다.
투자 유치도 비슷한 것 같다.
VC는 여러분에게 투자를 결정하는 데 있어 그리 오래 고민하지 않을 수 있다.
당신과 단 한 번의 만남, 단 몇 시간만의 인상으로 투자를 결정하게 될 수 있다.
그러니 뻔한 결론일 수 있겠지만 심사역과의 미팅에서 최선을 다하길 바란다.
필자는 크몽을 통해 투자 유치에 대한 컨설팅 서비스를 진행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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