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인수에게 주어진 단 4분의 시간
뮤지컬 '포미니츠'는 감옥을 벗어나고자 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다. 작품은 110분의 러닝타임 내내 정중앙에 피아노를 내세웠다. 특별한 장치가 없는 흰 도화지 같은 무대 위엔 그랜드 피아노 한 대가 전부이고, 장면에 따라 무대 위 왼쪽에 위치한 피아니스트를 향한 강렬한 스포트라이트도 비친다. 이렇게 '포미니츠'는 피아노를 둘러싼 이야기를, 정확하게 말하면 피아노를 열망하는 사람들의 마음을 그려낸다.
작품은 2006년 크리스 크라우스 감독의 동명의 독일영화를 원작으로 창작됐다. 실화를 바탕으로 한 원작 영화는 감독이 우연히 발견한 신문 속 한 여인의 사진으로 시작됐다고. 경직된 표정과 어울리지 않은 그의 고운 손을 보고 강렬한 이끌림을 가지게 되어 스크린으로 옮긴 이야기는 2007년 독일 아카데미 시상식 최고 작품상을 받았다. 한국 초연에 뮤지컬과 오페라 무대를 넘나들며 활동하는 배우 양준모가 예술감독으로 참여한 것도 주목할 점이다. 그는 작품의 뮤지컬화를 위해 직접 독일로 가 저작권을 획득할 정도로 열의를 보였다고 알려졌는데, “천재 피아니스트 제니가 보여주는 피아노 연주 퍼포먼스가 공연 무대에 올려졌을 때, 많은 관객에 감동과 울림을 선사할 것이란 확신이 들었다”고 작품 기획의 이유를 설명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60년 동안 여성 재소자들에게 피아노를 가르쳐 온 크뤼거가 루카우 교도소에서 살인수로 복역 중인 18세 소녀 제니를 만나면서 이야기는 시작된다. 제니는 모두가 감탄할 만큼 천재적인 재능을 가지고 있지만, 사납고 폭력적이다. 교도소 안에서 예기치 못한 사고에 휩쓸린 제니는 타의적으로 크뤼거의 피아노 수업을 듣게 되고, 두 사람이 처음 만난 날 제니는 담당 교도관 뮈체를 폭행하는 문제를 일으키게 된다. 그러나 크뤼거는 제니의 재능을 알아보고 그를 청소년 콩쿠르에 출전시킬 것을 제안한다. 세상에 대한 불신과 분노로 스스로를 격리시키던 제니는 자신을 포기하지 않는 크뤼거에게 서서히 마음을 열고, 이들은 감춰둔 상처를 드러내며 가까워진다.
대부분 뮤지컬 작품이 사건에 집중해 스토리가 진행된다면 '포미니츠'는 색다른 방식으로 이야기를 풀어간다. 바로 인물들의 심리적인 흐름을 내세워 시선을 확장하는 것이다. 작품의 주요한 인물인 크뤼거, 제니, 뮈체는 저마다의 '감옥' 속에서 살고 있다. 매 장면은 이들이 '감옥' 속에 갇히게 된 원인, 그것을 스스로 탈출하는 과정 등의 심리적인 변화를 얽혀냈다. 이렇게 작품의 주요 이야기인 세상과 전혀 소통하지 않았던 제니가 지닌 아픔과 상처는 과거 크뤼거가 소중한 사람을 잃게 된 사연과 후회와 만나, 서로를 이해하게 되는 이유가 된다. 또한 음악적 재능은 없지만 무던히 자신의 한계를 깨기 위해 애쓰는 뮈체는 제니를 향한 질투와 부러움을 드러내다 결국에 자신의 무재능을 인정하고 성장한다.
'포미니츠'에서 시선을 사로잡는 장면은 피아노 연주 퍼포먼스에 있다. 피아니스트를 내세운 퍼포먼스에 제대로 힘을 실었는데, 실제 공연 내내 무대 위에서 배우의 피아노 연주와 피아니스트의 피아노 연주는 누구의 것이 진짜인지 쉽게 구별이 되지 않을 정도로 경계가 모호해지며, 독특한 카리스마를 뿜어낸다. 박소영 연출가는 “피아노는 제니의 또 다른 존재, 자아인 동시에 제니의 마음의 표출시키는 존재다. 때문에 제니와 피아노를 연결했고, 피아니스트가 그의 감정을 연주로 대변하려 했다”고 밝혔다. 이렇게 제니의 모든 감정이 쏟아져 내린 연주는 무대 위의 피아노와 무대 밖 피아노가 함께 앙상블을 이루며 독특한 하모니를 탄생시켰다.
특히 작품의 하이라이트는 콩쿠르 본선 무대에서 펼쳐지는 제니의 연주다. 여러 사건 사건이 벌어지며 제니가 무대에 오르기 전, 크뤼거는 모든 이들에게 말한다. “딱 4분만, 4분만 달라”고. 그렇게 제니는 자신에게 주어진 단 4분의 시간 동안 자신의 모든 재능을 쏟은 슈만의 협주곡을 연주한다. 잔잔하게 시작되던 연주가 예상치 못한 연주로 변하는 그 순간, 관객은 당황스러움과 놀라움을 동시에 느낀다. 피아노 건반을 두드리고 발을 구르다가 건반을 훑어내다 갑자기 일어서서 피아노 현을 뜯는 천재 피아니스트. 폭발적인 에너지가 하나의 퍼포먼스로 보일 때, 비로소 ‘감옥’에서 벗어난 제니를 만날 수 있다. 틀을 깨고 본능에 가까운 제니의 피아노 연주를 위해 김환희와 김수하는 본격적인 공연 연습이 시작되기 5개월 전부터 피아노 연습에 돌입했다는 후문이다.
인물들의 감정선을 중심으로 진행되는 탓에 자칫 지루함을 느끼기 쉽다. 또한 이야기의 서사를 이해할 수 없는 지점도 꽤 있다. 친절하지 않은 이야기 속에서 쉽사리 그 행동을 납득할 수 없는 인물들도 존재한다. 그러나 '포미니츠'는 자신의 감정에 솔직하고, 상처를 치료하기 위해 ‘아프다’고 말하는 용기를 말한다는 점에서 뭉클한 감동을 전한다. 누군가와 아픔을 공유하는 것 자체로도 조금이나마 아물 수 있는 상처는 꽤 많으니까 말이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60년 동안 여성 재소자들에게 피아노를 가르쳐 온 크뤼거 역에 김선경과 김선영이, 살인수로 복역 중인 18세 소녀 제니 역에는 김환희, 김수하가 캐스팅됐다. 교도관 뮈체 역에 정상윤, 육현욱이 출연한다. 피아니스트 조재철과 오은철이 피아노를 연주한다. 오는 5월 23일까지 국립정동극장에서 공연한다.
* 온라인 연예매체 <뉴스컬쳐>에 기고한 리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