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노를 노래하소서, 시의 여신이여
얼마 전 우연히 ‘최고의 소설 도입부’라는 제목이 붙은 글을 읽었다. 여러 소설의 첫 문장을 모은 글의 10위로 이름을 올린 소설은 호메로스의 『일리아드』였다. “분노를 노래하소서, 시의 여신이여.” 세상의 아름다움을 모두 모았다 해도 과언이 아닐, ‘시의 여신’이 외치는 분노의 노래는 과연 어떤 선율을 지니고 있을까.
연극 ‘일리아드’는 서양 최초의 문학작품이자 그리스 최대의 민족 대서사시인 호메로스의 『일리아드』를 바탕으로 한 작품이다. 방대한 원작에 겁을 먹고 선뜻 걱정이 든다면, 안심해도 괜찮다. 연극은 10년에 걸친 그리스군의 트로이 공격 중 마지막 해에 일어난 사건을 펼쳐낸다. 그래도 망설여진다면, 영화 <트로이>를 먼저 감상한 후에 극장을 찾는 것을 추천한다. 영화의 주된 내용과 대표적 사건들이 연극의 주요한 내용이기 때문에 훨씬 이해하기 쉽다. 그리고 ‘일리아드’의 막이 내릴 때, 영화보다 흥미진진하고 짜릿한 1인극의 새로운 매력을 만날 수 있을 것이다.
미국 연출가 리사 피터슨과 배우 데니스 오헤어에 의해 희곡으로 탄생된 작품이다. 2010년 시애틀 레퍼토리씨어터에서 초연 이후 8개국 17개 도시에서 공연됐으며, 국내에서 처음 소개된다. 10년에 걸친 트로이 전쟁의 마지막 해에 일어난 사건들을 중심으로, 아킬레스와 헥토르를 비롯한 트로이 전쟁의 전사들과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신들, 전쟁으로 목숨과 터전을 잃은 사람들의 이야기가 110분가량 동안 진행된다. 한 명의 내레이터 역 배우가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1인극이다. 내레이터는 시간과 공간이 혼재된 무대 위에서 전쟁 속의 주인공이 되거나, 전쟁을 지켜보는 방관자가 되거나, 전쟁으로 인해 모든 것을 빼앗긴 희생자로 넘나든다.
작품은 1인극이라는 특징을 한껏 살려 배우에 따라 내래이터의 기본 설정도 차별성을 뒀다. 황석정은 타로 점술가, 최재웅은 홈리스, 김종구는 전쟁 박물관의 큐레이터라는 캐릭터로 분해 무대에 선다. 이들과 함께 무대에 오르는 ‘뮤즈’ 또한 각기 다르다. 이를 위해서 김달중 연출은 각 배우들의 특성에 맞춰 잘 어울리는 악기를 배치해 뮤즈로 낙점했다고. 황석정은 기타 김마스타와, 최재웅은 퍼커션 장재효와, 김종구는 하프 이기화와 무대에 오른다. ‘일리아드’는 내레이터의 개별적인 색이 강하게 영향을 미치는데, 각 내레이터에 특성에 맞춰 작품의 일부 장면이 추가되거나 삭제된 것으로 알려졌다. 이런 작업을 위해 배우와 창작진 모두가 머리를 맞대고 테이블 작업은 물론 연습과 리허설 과정에 각고의 노력을 기울였다는 후문이다.
관객이 객석에 입장하면 불이 켜진 무대에 이미 홈리스로 분한 내래이터 최재웅이 등장해 있다. 그는 혼잣말하거나 관객에게 시시껄렁한 농담을 전하며 ‘일리아드’의 오묘한 분위기를 만들어낸다. 비극적인 전쟁이라고는 느낄 수 없는 분위기에서 본격적인 막이 오르면, 아킬레스와 헥토르의 전투를 중심으로 한 트로이 전쟁이 오로지 내레이터의 이야기로 시작된다. 이미 대학로에서 또렷한 발음과 안정적인 연기력으로 인정을 받은 최재웅은 ‘일리아드’를 통해 자신의 장점을 아낌없이 보여준다. 어려운 그리스 신화의 인물 이름이나 지역명은 그대로 관객의 귀에 쏙쏙 박힌다. 특히 원작에서 고시(高時) 부분은 운율을 살려서 읽으라고 기록되어 있는 만큼, 대사마다 자연스럽고 신비로운 리듬을 살려 듣는 재미를 더한다. 힘을 줘야 하는 장면과 그렇지 않은 장면을 한껏 살려낸 ‘밀고 당기기’도 관객의 몰입도와 집중력을 휘어잡는 그만의 매력이다. 장면에 따라 순식간에 다른 인물로 변신하는 무대 위 최재웅을 보면, 1인극임에도 불구하고 잠시도 지루함을 느낄 새가 없다.
여기에 더해진 퍼커션의 연주는 ‘일리아드’를 더욱 완벽하게 만드는 요소다. 아킬레스의 새로운 방패를 만드는 장면, 아킬레스와 헥토르의 전투 장면 등은 작품에서 음악적으로나 시각적으로나 큰 인상을 남긴다. 또 단조롭게 보이는 무대는 조명을 활용해 그리스 신전으로, 혹은 피가 낭자한 전쟁터로 변화한다. 재미있게도 빛과 어둠을 활용한 그림자는 또 다른 인물의 등장처럼 흥미로운 감각을 선물한다.
‘일리아드’는 트로이 전쟁을 말하지만, 그 내부를 살펴보면 현재도 다르지 않다. 트로이 전쟁이 끝나갈 때쯤 내레이터는 마치 ‘전쟁의 한가운데’ 서 있는 듯하다. 그는 트로이 전쟁부터 십자군 전쟁, 제1차 세계대전, 제2차 세계대전, 한국전쟁 그리고 미얀마 사태까지 지구상에서 벌어졌던 다양한 전쟁들을 차례로 읊는다. 신들의 이야기가 적힌 이 오래된 이야기는 우리에게 말한다. 여전히 전쟁은 이어지고 있다고, 우리는 지금도 전쟁 속에서 상처받고 아파하고 슬퍼하고 있다고, 그리고 앞으로도 이 고통은 끝나지 않을 거라고.
* 온라인 연예매체 <뉴스컬쳐>에 기고한 리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