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세기 러시아로 향하는 붉은 티켓
뮤지컬 ‘그레이트 코멧’은 한국 뮤지컬 무대에서 쉽사리 볼 수 없는 신선하고 역동적인 작품이다. 지난해 9월 개막할 예정이었지만 코로나19(신종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의 영향으로 지난달 20일 첫 공연을 올렸다. ‘그레이트 코멧’은 미국의 작곡가 겸 극작가인 데이브 말로이가 톨스토이의 소설 『전쟁과 평화』의 일부 이야기를 바탕으로 만든 성스루(Sung-through: 대사 없이 노래로만 구성된 형식) 뮤지컬로, 원제는 ‘나타샤와 피에르, 그리고 1812년의 위대한 혜성’이다. 2012년 오프 브로드웨이에서 초연이 성공한 이후 2016년 브로드웨이 임페리얼 씨어터로 자리를 옮겨 공연됐다. 당시 브로드웨이 공연은 세계적인 팝페라 가수 조쉬 그로반을 주인공으로 내세워 화제를 모았고, 이듬해 토니 어워드에서 ‘최우수 뮤지컬상’을 포함한 12개 부문 후보에 오르는 성과를 이끌어냈다.
‘그레이트 코멧’의 강점은 모든 배우가 내뿜어내는 에너지다. 그리고 이를 가능하게 만든 것은 무대다. 공연장 유니버설아트센터 내부의 붉은 장식은 섬세한 디테일의 무대 디자인과 만나 19세기 러시아를 탄생시켰다. 시선을 사로잡은 것은 각기 다른 크기의 원형 무대로 겹쳐져 있는 본 무대다. 오필영 무대 디자이너는 대대적인 공사를 거쳐 1층 객석을 뜯어냈고, 그 자리에 7개의 계단식 원형 무대를 겹쳐냈다. 천장에 매달린 다섯 개의 샹들리에도 고풍스러움을 더한다. 구석 깊숙이 ‘코멧석’이라 불리는 관객석을, 양옆에는 오케스트라를 품은 채로 무대를 구성한 것도 눈길을 사로잡는다. 작품과 관객의 틀을 무너트리는 이머시브 시어터(관객 참여형 공연)의 특징을 한껏 강조한 무대는 식사와 공연을 함께 즐길 수 있게 100석 미만의 레스토랑에서 공연한 오프 브로드웨이 공연과 텐트식 공연장을 설치한 브로드웨이 공연을 재현하기 위한 방안이라고도 보인다. 비록 코로나19로 인해 한국 초연에서는 배우와 관객 사이의 적극적인 교류는 잠시 보류됐지만, 원형 무대와 객석 사이를 부지런히 뛰어다니는 배우들의 땀방울을 지켜보며, 그들의 뜨거운 에너지를 즐기기엔 무리가 없다.
‘그레이트 코멧’의 묘미는 직접 악기를 연주하는 ‘로빙 뮤지션’으로 활약하는 배우들이다. 본공연이 시작되기 전 무대와 객석 곳곳에서 펼쳐지는 짧지만 강렬한 연주는 예열 무대라고 부르기 아까울 정도로 수준급이다. 러닝타임 내내 연주자이자 앙상블 배우들은 관객과 호흡할 수 있는 가까운 거리에서 아코디언, 바이올린, 클라리넷, 비올라, 기타 등을 연주한다. 캐스터네츠로 박자를 맞추며 열정적인 춤사위를 벌이는 앙상블 배우들을 곁에서 지켜보다 보면 절로 손뼉을 치며 흥을 즐기게 된다. 또 극의 중심인물이자 이야기의 시작과 끝을 여닫는 피에르는 직접 아코디언과 피아노를 연주하며 시선을 사로잡는다. 게다가 그는 러닝타임 대부분을 정중앙에 설치된 원형 무대에서 김문정 음악감독과 함께 호흡을 나누며 멋진 연주 실력을 뽐낸다. 순수한 나타샤를 매혹하는 매력적인 군인 아나톨도 수준급의 바이올린 연주 실력으로 관객의 마음을 홀린다.
차이콥스키의 영향을 받아 19세기 러시아를 단번에 떠올리게 하는 러시아 전통 클래식을 시작으로 EDM, 팝, 포크, 클래식, 인디락, 일렉트로닉, 힙합 등 다양한 장르가 혼재된 것도 특징이다. 작품을 알맞게 풀었다 조이는 총 27곡의 뮤지컬 넘버들은 긴 러니타임 사이 지루함을 느낄 새가 없게 만든다.
작품은 톨스토이의 장편 소설 『전쟁과 평화』 제2권의 5장에서 영감을 받아 탄생했다. 약 70페이지에는 나타샤와 피에르가 여러 곡절과 시련 끝에 삶의 전환점을 맞이하는 이야기가 담겼다. 나타샤와 소냐가 로스토프 백작과 함께 모스크바의 오페라 극장으로 향하는 것부터 시작하는 원작 소설과 달리, 뮤지컬은 원작 소설이 낯선 관객들에게 등장인물들을 친절하게 소개하며 막을 올린다. 1막이 나타샤와 아나톨 사이의 격동적인 로맨스를 중심으로 이야기가 진행된다면 2막은 등장인물들의 감정선, 특히 피에르가 갈구하는 철학적인 고찰에 치중한다. 나타샤와 헤어지고 안개 속으로 사라지는 피에르 머리 위로 1812년의 대혜성이 지나가는 마지막 장면은 뭉클함을 전한다.
원작자 데이브 말로이는 “소설의 형식적인 구조와 톨스토이의 뛰어난 서술적 표현과 수사적 스타일을 포용했다”고 밝혔다. 그는 원작 소설의 문장 전체를 조금씩 다듬으며 가사의 형태를 완성해갔다고. 톨스토이가 다양한 인간 경험을 유기적으로 이끌어내어 소설을 탄생시킨 것과 마찬가지로 ‘그레이트 코멧’ 또한 몇몇의 에피소드를 엮어내 등장인물들 사이의 감정적인 영향을 섬세하게 그려냈다. 또 원작 소설이 지닌 문학적 특징을 살리기 위해 노력한 부분도 돋보인다. 등장인물들이 자신의 행동을 직접 서술하거나 제3자의 시선으로 자신에 관해 이야기하도록 한 대사들은 낯설지만 신선한 충격을 건넨다. 송스루 특징을 살려 대사와 감정을 멜로디로 대변해 풍부한 감정을 더했다. 다만, 원작 소설의 대략적인 스토리를 파악하거나, 인물 관계도를 예습하지 않는다면 이 작품을 이해하긴 쉽지 않다.
부유한 귀족이지만 사회에서는 겉돌고 불행한 결혼생활과 삶에 대한 깊은 회의 속에서 방황하는 피에르 역에는 홍광호와 케이윌이 캐스팅됐다. 전쟁에 출전한 약혼자를 그리워하는 순수한 여인 나타샤 역에는 정은지와 이해나가 출연한다. 매력적인 젊은 군인이자 나타샤를 유혹하는 아나톨 역은 이충주, 박강현, 고은성이 맡았다. 5월 30일까지 유니버설아트센터에서 공연한다.
* 온라인 연예매체 <뉴스컬쳐>에 기고한 리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