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슬람·비잔틴·노르만 … 동서양 문화 어우러지다
“시칠리아는 아랍, 로마, 그리스, 게르만 문화까지, 동∙서양 문명이 합쳐진 작지만 큰 세상이지요.” 로마, 밀라노, 베네치아 같은 이탈리아 유명 관광지를 제치고 시칠리아를 꼭 찾아야 하는 이유를 묻자 시칠리아 관광국 스카피디 세르지오 국장은 이렇게 답했다. 그의 말대로 시칠리아의 풍경은 가히 다채롭다.
유럽에서 쉽게 접하기 어려운 화려한 비잔틴 양식의 모자이크부터 기하학적인 문양의 노르만 건축물들이 즐비하다. 튀니지와 몰타 공화국과도 가까워 아프리카 같은 분위기도 느껴진다. 골목 곳곳에는 끝없이 펼쳐지는 지중해를 배경으로 에스프레소를 마시는 금발의 청년과 향긋한 사이프러스 나무 아래서 신선한 참치 스테이크를 즐기는 검은 머리 아가씨들의 수더분한 웃음 소리가 넘쳐난다. 시칠리아에서 나고 자란 패션 디자이너 도메니코 돌체는 섬의 건축물과 자연환경에서 영감을 받아 지금의 패션 브랜드 ‘돌체 앤 가바나’를 완성시켰다. 로마를 시작으로 아랍, 노르만, 스페인, 오스트리아 등 여러 민족의 통치를 받은 시칠리아는 뼈아픈 역사를 극복하면서 여느 유럽 도심과는 구분되는 생동감 넘치고 창조적인 섬으로 자리잡았다.
예술∙역사∙문화 도시, 팔레르모
“팔레르모에는 한가지 전설이 있어요. 도심 왼편에 강아지가 누워있는 듯한 모습의 펠레그리노 산이 있는데, 이 산이 깨어나서 일어나면 마피아가 사라진다는 이야기예요.” 첫 목적지는 영화 ‘대부3’의 촬영지이자 마피아의 본거지라고 알려진 시칠리아의 주도 팔레르모였다. 인천공항에서 로마까지 12시간, 로마에서 1시간 더 비행하면 팔레르모에 도착할 수 있다. 관광객들은 대부분 영화 속 스산한 분위기를 상상하며 팔레르모를 방문하지만, 팔레르모 시가지에 도착하는 순간 생각이 180도로 바뀐다. 팔레르모는 여유롭게 산책을 즐기는 시민과 활기찬 상인이 모여있는 정겨운 모습으로 여행객을 반긴다. 봄∙여름∙가을∙겨울을 상징하는 조각이 새겨진 ‘네 개의 모서리’를 의미하는 건물 콰트로 칸티를 시작으로 웅장하고 고혹적인 구시가지가 펼쳐진다.
자동차 통행이 금지된 거리를 걷다 보면 곳곳에 시칠리아의 역사∙예술∙문화를 느낄 수 있는 공간을 만날 수 있다. 피렌체 출신 조각가 프란체스코 카밀리아니가 16세기에 완성한 프레토리아 분수, 이슬람 사원이었던 건물을 12세기 말에 성당으로 개조한 팔레르모 대성당, 노르만∙비잔틴∙이슬람 양식이 합쳐진 팔레르모 노르만 궁전, 이탈리아에서 최대 규모를 자랑하는 마시모 극장 등이 그것이다. 이탈리아 본토에서 볼 수 있는 조각상들 사이로 둥근 형태의 이슬람 사원 지붕이 솟아있는 독특한 정취가 이곳의 가장 큰 매력이다.
해가 저무는 늦은 오후, 팔레르모 거리는 더욱 활기를 띤다. 뜨거운 태양을 피해 실내에 꽁꽁 숨어있던 시민들이 선선한 지중해 바람을 맞으며 파쎄쟈타(passeggiata∙식사 후 거리를 거니는 행위)를 즐기기 위해 나온다. 거리 양 옆으로는 기념품을 판매하는 노점상들과 길거리 음식을 맛볼 수 있는 테이블과 의자가 놓여진다.
시칠리아에서 꼭 맛봐야 할 음식인 ‘카놀리(Cannoli∙밀가루, 계피, 설탕, 꿀, 와인을 넣어 만든 원통형 모양의 껍질에 리코타를 넣어 만든 음식)’와 ‘아란치니(Arancini∙라구소스, 모차렐라, 콩을 밥과 함께 섞어서 빵가루를 입혀 튀긴 요리)’도 쉽게 찾을 수 있다.
해양 휴양지 체팔루, 활화산 에트나
팔레르모에서 1시간 정도 떨어진 거리엔 그림 같은 해양 휴양도시 체팔루가 있다. 체팔루는 영화 ‘시네마 천국’에 등장해 더욱 유명해진 곳이다.
주인공 토토가 영화관에 들어갈 수 없는 사람들을 위해 야외 상영을 하다가 여주인공과 빗속의 키스를 나누는 바로 그 장소다. 따사로운 햇살에 에메랄드 빛 지중해가 보석처럼 반짝이는 이곳은 영화 속 낭만, 여유로움, 따뜻한 감성 등을 고스란히 느낄 수 있는 곳이다.
장엄하게 서 있는 바위산 로카 디 체팔루, 해변가 야외 레스토랑에서 황혼을 바라보며 시원한 맥주를 들이키는 사람들, 백사장에서 자유롭게 뛰어노는 아이들, 층층이 빨래를 널어놓은 작은 집들을 바라보노라면 영화 속 ‘천국’으로 들어온 듯한 황홀함을 느낄 수 있다.
시칠리아에서는 시원한 지중해뿐 아니라 뜨겁게 끓어 오르는 유럽 최대의 활화산 에트나도 볼 수 있다. 시칠리아 동부에 있는 에트나는 해발 3350m, 둘레 200km에 이르는 거대한 산이다. 곡선이 경사진 도로를 굽이 굽이 올라가면 검은 돌들이 보이는데, 자세히 들여다보면 흐르다 굳은 용암 덩어리들이다. 정상에 오르면 볼 수 있는 것은 검은 흙뿐이지만 끝이 보이지 않는 분출구 크기에 압도 당하고 만다. 하얀 김이 모락모락 피어 오르는 산봉우리를 멀리서 보는 것만으로도 살아 숨쉬는 대지의 기운을 느낄 수 있다. 자연과 문화, 예술과 맛까지… 작은 시칠리아가 왜 큰 세상인지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시칠리아=라예진 기자 rayejin@joon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