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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대가 끌리는 이유

by 유현우

만남과 이별.

행복과 불행.

풍요와 빈곤.

그리고

삶과 죽음.

연거푸 말해왔듯이 이분법 세계 그러니까, 이 세계와 저 세계 사이에는 언제나 기다림이라는 사고이자 행위가 이와 저 가운데 우뚝 팔짱을 낀 채 서 있다는 것을 미리 말하고 싶다. 어느 한 쪽으로 쏠리지 아니한 채, '매우 그렇지 않다-그렇지 않다-보통이다-그렇다-매우 그렇다' 5첨 척도 한가운데, '보통이다'에 우두커니 서 있는 것이 기다림이다. 모순적이게도 인간이라는 존재, 적어도 나라는 인간은 찬성을 그토록 원하는 삶을 기다리면서 살아가다 마침내 찬성을 곁에 두게 되는 날과 이따금 완벽한 시간의 실종을 겪었기도, 겪기도 할 테다. 이때 물씬 시간만 야속하다고 느낀다면 다행이지, 간사하게 우리는 아니 적어도 나는 반대에게 끌리더라. 이럴 때마다 나는 세상에 외마디를 내뱉는다. 그리고 '모순적이다.'라고 덧붙인다. 그토록 찬성하기를 원했고, 만나기를 바랐고, 행복하기를, 풍요롭기를, 살고 싶기를 바랐던 나는 도대체 반대가 끌리는 이유가 무엇일까.

그럴 때마다 2004년 지오디의 [반대가 끌리는 이유]의 가삿말을 되새김질한다는 것은 새빨간 거짓말이다. 다시, 크흠. 기다림에 지쳤기에 그런 것일까. 아니다. 삶은 기다림 그 자체라는 것을 믿고 살아온 지는 나만의 오프라인 공간을 세상에 내놓은 계획부터 오늘날까지의 시간이 되었다. 기다리는 동안 나는 많은 생각과 움직임이 동반되었음을 다시 한번 말하고 싶다. 알았다. 두렵기 때문이다. 절대 계획적인 삶을 살아가는 인간이 아니라고 자부하지만, 반대를 두려워하기에 찾아오지 않기를 바라기에 나는 계획적으로 끌려 하는지도 모른다. 어떤 이가 만남이 있으면 이별을 하고 싶어 할 텐가(단, 잘못된 사고와 판단을 했기에 원할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여기서 만남과 이별은 꼭 사랑이라는 지표로 한정지어선 아니 될 테고), 행복한데 불행을 원하는가, 풍요로운데 빈곤을 원할 텐가, 잘 살아가고 있는데 죽음을 원할 텐가. 그렇다. 반대가 끌리기보다 반대가 두려운 것이다.

반대가 두렵기에 나는 오늘도 계획적으로 살아간다. 반대가 끌리는 순간이 다가오면 모순적이라며 인정하고 살아간다. 반대를 수용하면 다시 반대를 끌어당기는 남아 있는 나날을 위해 살아가면 된다. 탓하기 전, 주어진 상황에 있어서 자기 나름의 '확고한 소신'이 흔들리진 않았는지. 스스로 단언할 수 있는 순간부터 한 번의 기회가 찾아오게 되어 있다는 것을 지난 2024년 11월 30일 22시 10분에 끄적였던 글이 오늘의 나를 소환한다. 이렇게 생각해 보면 어떨까. 만남이 있으면 이별이 있을 테고, 행복이 있으면 불행이 있을 테고, 풍요로운 날이 있으면 빈곤한 날이 있을 테고 그리고 삶이 있다면 죽음은 당연할 테다. 나쁜 날도 좋은 날도 이 또한 지나간다. 그러니 하루하루 애걸복걸 애쓰며 계획적인 삶을 살아가는 것도 좋지만, 아니 되는 날도 있으니 중용, 평정심을 중얼거리며 보통날(지오디의 [보통날]의 가삿말을 되새김질한다는 것은 이번에도 새빨간 거짓말) 우뚝 팔짱을 낀 채, '보통이다'에 우두커니 서 있으면서 나와 같이 살아가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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