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사물을 주관적으로밖에 볼 줄 모르기에 망했다.’
고등학교 3학년 국어 시험 전날 밤 누이가 건넨 박카스를 마시고 취했다. 명백히 누이 탓을 하지 않았고, 박카스에 대한 이해가 부족했기에 달빛 아래 방구석에서 누이와 웃음을 계속 ㅋㅋㅋ ㅋㅋㅋ 아니 ㅋㅋㅋ 미치겠네 왜 자꾸 웃음이 나오냐 ㅋㅋㅋ 그만 ㅋㅋㅋㅋ 아, 망했다. 한 시간이 넘도록 이런 식이었다. 그날 이후로 시험, 면접, 출근 전날 밤에는 박카스를 눈에도 대지 않았다.
커피를 마시면 잠이 오지 않는다. 오후 네시 전까지 두 잔 정도면 두 다리를 주욱 뻗고 왼팔에는 키티 인형을 끌어안은 채 귀뚜라미 소리를 하나씩 더해가며 잘 수 있다. 저녁 식사를 마치고 온 재덕은 늘 맛있는 필터 커피를 주문한다. 오늘은 케냐 무쿠웨이니 AA TOP를 대접하기로 한다. 자몽, 청사과의 산뜻하고 쥬시한 산미 후에 오는 견과류의 너티함까지. 에스프레소 잔에 나 한 모금 머금고 삼키고 향을 내뱉고 미소를 짓는다. 그리고 그에게 건넨다. 만족스러운 듯 한 그의 입가의 주름은 마치 초승달과 그믐달이 동시에 떠 있다고 해도 과언이다. 다시 말해, 그에게 커피는 맛있었다. 때문에 나는 잠을 잘 잤다.
재즈에 관한 이야기를 해볼까 한다. 2025년 벚꽃 필 무렵 신당동 바이닐샵에서 Donald Byrd의 앨범들을 약 90만 원을 주고 데려왔다. 평소 하드밥을 즐겨 듣는 나이지만 개중에는 프리재즈와 포스트 밥이 끼어 있었다. 듣지도 않는 아니, 듣기 난해하다고 해야 할까. 그러한 앨범은 내게 당장 필요 없음에도 구매를 했다. 일종의 충동구매다. 앨범 재킷에 새들이 날아다니면 보통 마음이 평온했다. 새들이 그려져 있기에 바이닐을 집어 들었고, 구매했고, 그러고 나서 최초의 서두로 돌아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