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주류

by 희량

최근 가수 최유리 님의 ‘숲’이라는 곡이 여러 경로로 내게 다가왔다. 이 친구, 저 친구, 하나같이 곡이 좋다며 들려줬다. 나도 덩달아 귀 기울여 듣는데, 문득 최유리 님이 지나온 시간이 궁금해졌다. 이 잔잔한 곡이 내게 닿기까지, 얼마나 긴 걸음을 이었을지 궁금했다. 혀도 귀도 자극을 찾는 흔한 한국인의 취향과는 상반된 편인데. 쿵쾅대는 사운드가 가득한 케이팝의 시대에 독백과도 같은 음악이라니. 이분은 어떻게 이 잔잔함을 고집할 수 있었을까.


내가 매력을 느끼고 빠져드는 것들은 죄다 구석탱이에 있었다. 글이 좋고, 국악이 좋고. 내 이력 중 가장 트렌디하고 화려한 기록은 의상학 전공인데, 그마저도 디자인도 마케팅도 아닌 복식미학이라는 무거운 학술적 영역에 눈을 뜨고 말았다. 이것 참. 과학도 기술도 코딩도 마케팅도 모르고 어떻게 먹고 살려고? 난 세상의 중심으로는 침투할 수 없을 것만 같았다.


난 자꾸만 취업의 공식에서 벗어난 선택을 했다. 함께 인문사회과학 캠퍼스를 함께 누볐던 친구들 중 두 명이나 코딩과 개발과 데이터 분야에 발을 넣었다. 내게 코딩이란 멀고 묘연한 일인데! 난 그 뒤에 남아 날 지나쳐가는 뒤통수만 쳐다보고 덩그러니 놓여있다. 세상이 돌아가는 원리를 나만 설명할 수 없다는 건 외롭고 초조한 일이다.


하지만 '그거 해서 어떻게 먹고 살래'라는 질문에 휘둘리지 않는 사람들이 있다. 주변에 한문을 번역하고 공부하는 언니들이 그랬다. 요즘 시대에 20대를 지나는 팔팔한 청춘들인데. 그 언니들은 한문이라는, 이젠 한국에서 꽤 소외된 언어를 선택하는 것에 거리낌이 없어보였다. 물론 속으로 어떤 고뇌를 앓았을지 알 수 없는 일이지만, 결정만큼은 확고하고 선명해보였다.


글을 짓고 시를 쓰는 모든 사람들도 그랬다. 난 영상의 시대에 글을 붙잡고 있는 것이 도태와 미련일까 두려웠는데, 굴하지 않고 쓰는 사람들이 있다. 기어코 글이라는 정통의 방법으로 사람들을 휘어잡고 마는 사람들이 있다. 그렇게 구성진 문장으로 삶을 표현하니 주목하지 않을 수가 없지.


이렇게 멋진 사람들이 있는데, 뒤쳐지는 건 두려운 일인가? 애초에 뒤쳐지는 게 맞나? 꼭 세상의 중심으로 파고들어야 하는 건가? 애초에 그게 세상의 중심이 맞나? 다수가 뭉쳐 묵직해졌을 뿐이지. 중력이 모이고 고인 행성과 블랙홀들을 우주의 중심이라고 하진 않는다(천문학 모름). 분명 세상은 앞서거니 뒤서거니, 중심이니 주변이니 하는 단어로 구획을 나눌 순 없을 것이다.


큰 강의 물줄기를 따르지 않아도, 어떤 물들은 하천을 채운다. 이 세상을 굴러가게 하는 톱니바퀴를 하나씩 나눠가졌다면, 누군가는 모서리에 위치할 수도 있겠지. 무슨 운명론처럼 말하고 싶지는 않지만, 내가 굴리는 톱니바퀴는 내가 굴릴 만하니 붙잡았던 것 같다. 최유리 님이 케이팝을 부른다고 상상하면 금방 아쉬워지는 것처럼. 누군가는 한문의 세상을 채우는 것처럼. 내가 밝힐 수 있는 영역은 흐름을 거슬러야 다다를 수 있는 걸지도 모른다.


글도, 국악도, 학문적인 패션도, 내가 그동안 사탕 모으듯 열심히 꽁쳐둔 내 삶의 귀중한 조각이다. 세상의 한가운데 있지도 않고, 바깥만 유영하는 듯한 느낌이지만 괜찮다. 중요한 건 누군가한테 닿는 일이 아닐까. 최유리 님은 조용한 곡들을 차분히 쌓아올려 결국 나한테까지 닿고 말았는데, 내 이야기도 또 다른 누군가에게 뻗어나갈 수 있도록 자꾸 신호를 보내봐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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