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력 앞의 나

by 희량

동아리 선배 중에 우 씨(이하 ‘우씨’)가 있다. 우씨는 나보다 선배고, 나는 우씨에게 존댓말을 쓴다. 그러고 보니 우씨도 나한테 존댓말을 쓰네. 그렇지만 어쨌든 우씨는 나보다 나이가 많고, 선배고, 그래서 나는 그를 이름으로 부르진 않지만 우씨는 나를 이름으로 부른다.


우씨와 종종 학교에서 마주치면 나는 손을 휘저어 인사하는데, 우씨는 고개를 꾸벅 숙이고 목례를 한다. 목례는 원래 우씨가 인사하는 방식이란다. 나는 고개를 빳빳이 들고 손을 흔드는데 우씨가 고개를 숙이면 기분이 조금 요상해진다. 내가 우씨보다 윗사람이 된 것 같은 느낌에 살짝 불편해지면서도 어떤 짜릿함이 있다. 상하 관계가 뒤바뀌는 순간 맛볼 수 있는 쾌감이랄까. 나는 어쩌면 이런 권력의 전복에 열광할 수밖에 없는 유전자가 있는 게 아닐까?


안티에그에서 글을 오래 써오면서 내 글은 자꾸만 패션에서 권력이 흐르는 방향, 권력 바깥의 소수자 등등 ‘힘’의 구조와 원리에 대한 쪽으로 기울었다. 의도했다기보다는 내 관심사를 커다랗게 묶는 대분류가 ‘권력’이었던 것이다. 패션은 그 권력을 강하게 하기도, 뒤집어버리기도 하는 분야라 내가 점점 패션에 빠져든 것이 아닌가 싶다. 그 양면성은 정말 헤어나올 수 없이 매력적이기 때문이다. 애증을 자극하거든… 사랑보다 애증이 서로를 더 지독하게 엮지 않나.


그러나 나는 누구보다 권력에 무릎 꿇고 마는 사람이기도 했다. 회사에 다니는 동안 상사의 업무 지시에 쉽게 복종했고, 지나친 근로시간과 부당한 계약관계에 대해서도 불만 하나 제기하지 않았다. 수용과 묵인이 가장 쉬웠다. 상사를 대하는 일을 매우 어려워했고, 메일 하나 보낼 때마다 수없이 뉘앙스를 검토했다. 혹시나 예의에 벗어났거나 거슬리는 문장이 있을까봐. 어떻게 보면 구질구질하기까지 하나, 윗사람의 눈밖에 나지 않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것은 내가 자라는 과정에서 주입된 강력한 특징이다.


나와 성장배경이 비슷한 고등학교 친구와 자주 말하는 주제가 있다. 바로 한국의 주입식 교육을 우수하게 완수해낸 우리는 권력 관계 앞에서 이의를 제기할 줄도 의견을 표명할 줄도 모른다는 것이다. 성격이 형성되는 중인 말랑말랑한 청소년기에 반항 한 번 해봤어야 누군가의 권위를 개똥으로 여겨보기도 할 텐데. 학교란 얼마나 좋은 연습 공간인가. 선생님께 이의제기하는 건 회사에서 하는 것만큼 불이익이 오는 것도 아닐 텐데. 말 잘 듣는 학생은 조용한 어른이 되었다.


한편으로는 이견을 제시했을 때 상대방이 내 생각을 충분히 고려하고 수용할 만한 가능성이 있는지, 이 또한 행동에 영향을 미쳤던 것 같다. 그 가능성이 없을 경우에는 행동이 좌절되기도 했으니까. 단호한 선생님이나 상사 앞에서는 입을 다물었다. 그 단호함이란 내가 무슨 말을 꺼내도 반대할 것 같은 느낌이랄까. 그러나 어떤 의견이든 주저하게 된다면, 과연 나와 상대방에게 장기적으로 도움이 될까? 속마음을 잘 얘기하지 않는 사람은 언젠가 폭발하던데.


상하 관계를 극복하고 자유롭게 의견을 내기까지 내가 극복해야 하는 두려움은 꽤나 커다랗다. 목소리가 떨릴 것 같고, 그런 내 모습을 마주하고 싶지도 않아 시도하지도 않는다. 이런 모습을 나의 소심함으로만 탓할 수는 없다. 이 한국 사회와 문화의 구조 때문에 내 재능을 빛내는 데 어려움을 겪는 거다. 나는 아이디어도 풍부하고, 브레인스토밍하는 것도 좋아하고, 의사소통 능력도 꽤나 우수한 편이고, 다같이 머리를 맞대어 훌륭한 방안을 도출해내는 것을 즐거워하는데.


그러나 항상 체제를 탓하고 있을 수만은 없다. 나만큼은 절대 탓하지 않기 위해 애쓸 거지만, 외부의 영향을 실컷 탓하더라도 움직이는 건 나여야 했다. 극복하는 것도 나, 노력하는 것도 나, 목소리의 떨림을 잘 갈무리하고 배에 힘을 주어 목소리를 내어보는 것도 나. 억울하지만 내 몫이다.


난 아직 세상이 무섭지만, 그래도 이십대 초반과 비교해보면 세상과 부딪혀온 시간이 나름 쌓였다. 이십대 후반, 딱 그만큼의 연륜과 서투름이 있으리라 기대하며, 권력과 권위 앞에서의 적당한 처세를 고민해간다. 언젠가 나도 건강한 권위를 부릴 수 있을 때까지. 일단 지금은 우씨의 목례를 즐겨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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