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모임

by 희량

올해 초, 재미있는 생각이 들었다. 책 얘기를 나누는 친구들이 여럿 있는데, 따로따로 대화하는 게 문득 아쉬웠다. 이들을 모아놓고 다 함께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다. 이들은 모두 서로 접점이 없었고, 오로지 나만 아는 사이였다. 이 특징조차 매력적이었다. 서로 모르는 사이이기 때문에 낯설지만 나를 한번 거쳤다는 점에서 친근함을 느끼는, 알 듯 말 듯한 사이. 지금까지 이런 모임은 없었다! 이것은 친구인가 타인인가. 독특한 만남일 것 같아 호기롭게 사람들을 모았다.


그렇게 다섯 명이 모여 독서모임을 시작했다. 달에 한 번씩 모여 어느새 여섯 번이나 만난 이 매력적인 모임! 순조롭다. 순조롭기뿐일까! 독서모임에 대한 만족스러움과 애정 어린 후기를 지속적으로 받고 있다. 이 모임에 참여하는 친구 불주먹은 독서모임을 만든 일이 “올해 가장 잘한 일”이라며 나를 칭찬해주었다. 나도 이렇게 이 모임이 흥행(?)하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돌이켜보면, 내가 책 이야기를 즐겨 나누던 사람들을 한데 모아보고 싶다는 발상이 그렇게 억지스럽진 않았던 것 같다. 나랑 사고방식이 잘 통하는 사람들이었고, 그래서 더 서로의 언어가 비슷했던 게 아닐까? 내가 이 좋은 만남을 이끌고, 서로의 인연을 이었다는 것이 감격스럽다. 다들 서로 좋아해주고 반가이 맞아주는 것이 아주 고맙다.


우리 모임은 존댓말로 진행된다. 나도 평소 반말을 쓰는 친구들이 셋이나 있지만, 모임에서만큼은 존대를 쓴다. 초반에는 스쳐가듯이 우리가 더 가까워진다면 반말도 써보자는 이야기도 나왔으나, 지금은 우리의 존대가 퍽 마음에 든다. 여론도 꽤 괜찮다. 서로에 대한 존중을 기반으로 하고, 지나치게 가깝지 않은 적절한 거리감이 오히려 깊은 생각을 내놓기에 편안했다. 의젓한 어른들의 모임 같아, 뿌듯하기도 했다.


첫 만남 때는 그저 나와 어떻게 만나게 되었는지를 설명하기 바빴다. 동아리에서, 대외활동에서, 학과에서 등등… 나이도, 출신학교도 서로 소개한 적이 없다. 나와의 관계를 통해 추정할 수 있거나, 책을 읽고 생각을 나누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꺼낸 적이 있을 뿐이었다. 심지어 애인의 성별을 모르는 사람도 있다. 종종 나이나 학교 같은 정보는 사람을 바라보는 시선을 방해한다. 어쩌면 성적 지향까지도. 나도 모르는 사이에 그 사람에 대한 판단을 고정해둘 수도 있지 않나. 나와 유사하다는 동질감 또는 유사하지 않다는 거리감 모두 일종의 판단이었다. 그래서 이 모임은 어떤 방해도 없이 서로를 올곧게 바라볼 수 있는 공간이 될 수 있다고 기대하게 되었다.


우린 그렇게 서로를 구성하는 인구통계학적 정보는 공백으로 비워둔 채, 각자 마음 속 깊은 곳을 구성하는 가치관과 속 이야기를 꺼내기에 여념이 없다. 가끔 농밀한 비밀처럼 느껴지는 이야기를 꺼낼 때도 있는데, 스스럼 없는 발화에 한 번 놀라고, 담백한 반응에 두 번 놀랐다. 나도 어떤 가까운 친구에게도 차마 말하지 못한 속사정을 이 모임에서 꺼내놓았다. 평소에는 쉬이 말을 꺼내지 못해 입 안에서만 맴돌거나 마음 속에 머금고만 있는 날이 허다했는데. 충동적이었다. 갑자기 이 사람들에게 내가 겹겹이 감춰온 비밀을 털어놓고 싶었다. 편안한 분위기와, 나의 어떤 결정도 존중해줄 것 같은 믿음, 쉽사리 판단하지 않는 신중함, 내 상황과 생각을 이해해주는 배려 덕분이었다. 여섯 번의 모임을 통해 우린 서로 이런 감정들을 쌓았나보다.


친구 불주먹은 이 모임을 두고 “무해하다”고 표현했다. 감사하게도! 그 무해함을 나도 이해한다. 예전에는 독서모임이라고 하면 조금 두렵게 느껴지기도 했다. 나의 부족함을 자각하는 공간이 될 것 같았기 때문이다. 애써 숨겨온 눌변, 부족한 논리력, 반박 한번에 고꾸라지는 주장, 기어들어가는 자신감을 마주할 것 같았다. 그러나 이 모임에서는 아무것도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논리적인 척하지 않아도 되고, 굳이 잘나지 않아도 되고, 어떤 방향으로든 포장하지 않아도 된다. 말을 더듬어도 괜찮았다. 말하다 울어도 괜찮았다. 서로 잘 모르는 사이지만, 서로에게 있는 힘껏 다정한 사람들이었다.


아, 서로 모르는 게 많아도 누구보다 친근한 사이가 가능하다는 건 정말 매력적인 일이다. 이들은 서로의 삶을 들여다보지 않은 상태에서 걱정해주고, 배려해 주고, 응원해주고… 다정과 사랑이 넘쳐난다. 친밀함은 거리감으로 설명하는 게 아니었다. 소중하고 놀라운 깨달음이다.


그렇다고 지금 서로 적당한 거리에서 존중하는 이 사이가 영원히 지속되어야 한다고 못 박는 건 아니다. 우린 지금 1주년도, 10주년도, 30주년도 계획하고 있는데, 그 사이 우리의 관계가 어떻게 더 진해질지 모르는 일이다. 어쩌면 더 친밀해지지 못해 아쉬움을 느낄 때가 생길지도 모르겠다. 물론, 백발이 되어서도 서로 존대 쓰는 사이면 그거대로 근사할 것 같지만! 아무튼 오래오래 만나서 늙고 주름질 때에도 같이 책 읽고 깔깔대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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