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

by 희량

종종 죽음에 대한 공포에 잡아먹힐 때가 있다. 삶에 대한 미련도 있겠지만, 그보다는 좀 더 원초적인 두려움이다. 자아가 사라지는 ‘무(無)'의 상태에 대한 공포. 전원이 꺼져버리듯, 모든 게 사라진 정적의 상태는 내가 세상에 존재했던 시간보다 훨씬 무한할 것이다. 그 길고 긴 고요함이 두렵다. 더 이상 내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 두렵다.


인어공주 이야기는 비현실적인 동화라고만 생각했는데, 나도 물거품이 되어 사라지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내가 죽고 나면 오늘 행복했던 시간은 누가 기억할까. 역사 속 일상도 이미 사라졌고, 물거품이 되었다. 위인이 된다고 해도 수십 년의 일생이 책 한 권을 읽는 찰나로 요약될 뿐이다. 오늘 하루를 채운 촘촘한 시간들은 내가 사라짐과 동시에 사라져버린다.


동시에 기대한다. 무한한 다양성과 불확실성이 교차하면서 만들어내는 세상의 흐름은 너무나도 정교하지 않나. 무언가 전지하고 전능한 존재를 기대해도 되는 것이 아닐까. 삶이 길고 거대한 시스템의 일부라면, 죽음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렇다면, 죽음이 꼭 끝이 아니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 않을까.


사후에 무언가 내가 모르는 세상이 있길 바랐다. 내가 나로 있을 수 있는 어떤 공간을 바랐다. 하지만 내 사고가 뇌의 물리적 작용의 결과라면 영적의 무언가가 존재할 수 있다고 믿을 수 있을까? 대뇌피질인지 전두엽인지 뇌의 기능을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죽음이 더 잔인하게 느껴졌다. 내 모든 의식과 인식과 사고는 정신적인 게 아니라 물리적인 것뿐일까…


무한한 삶을 원할 수도 없다. 나와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이 겪는 고통을 떠올리며 생각했다. 이렇게 아픔으로 가득한 불완전한 세상인데, 무한히 사는 것도 큰일이었다. 죽음에 대한 필연적 공포 앞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며 바들바들 떨기만 했다. 이 공포는 생각보다 커다래서 종종 날 완전히 점령해버릴 때가 있다. 펑펑 울고 배가 아플 정도로 무서워할 때가 있다. 정말 불쌍한 어린 양이지 않나…


그러던 중, 광복절을 기념하는 현수막을 보는데 내가 어떤 피와 땀을 밟고 서있는지 깨달았다. 오늘날 내가 보내는 일상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죽음에 뿌리를 내리고 있는가. 내가 누리는 존엄과 자유와 권리는 무얼 빚지고 있는가. 앞선 사람들의 삶과 죽음은 내가 살고 있는 세상의 모든 면면을 구성했다. 이 아득하고 광활한 내리사랑이 황송하다.


죽음은 세상을 바꾸어왔다. 세상이 한 방향으로만 흐르는 것은 그 무엇도 돌이킬 수 없다는 점에서 잔인하고 단호하지만, 그만큼 모든 것이 쌓인다는 뜻이었다. 그렇게 끊임없이 미래를 구성해왔다. 이토록 무수한 삶과 죽음이 중첩된 세상에 내가 기쁘게 살고 있다. 심지어 사라짐을 통탄해할 정도로 자아와 삶을 사랑하면서…


어쩌면 내 삶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무언가를 쌓겠지. 내 일상은 사라지겠지만, 어떤 작은 문장 하나라도 남겨둘 수 있겠지. 어떤 변화의 조그맣고 하찮은 일부라도 차지할 수 있겠지. 적어도 순식간에 사라져버리는 물거품만큼 덧없진 않을 것이라는 기대감이 생긴다. 그렇다면 피할 수 없더라도 조금은 받아들일 수 있겠더라. 하지만 무섭다. 소멸에 대한 공포는 아무리 해도 극복할 수가 없다.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여성의 고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