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킨을 먹다 말고 뜽귱이 입을 열었다.
“아이고 우리 꼬꼬댁~”
느닷없이 어처구니 없는 소리였다. 나 보고 닭이라는 소린가?
“웬 꼬꼬댁?”
“귀여워서 아무 말로도 귀여워하고 싶어.”
“ㅋ”
“귀여우면 어떤 말로도 귀여워할 수 있는 거 알아?”
“말이나 못하면!”
결국 화창하게 웃고 말았다.
나의 연애가 얼마나 닭살인지 드러내고 싶진 않았지만… 내가 생각할 때 연애의 가장 본질적인 개념을 써보고 싶어서 살짝 공개해본다. 연애라는 현대 사회의 거창하고 맹목적인 가치를 써내려가는 것은 참 어려운 일이지만, 내 일상과 생각으로 채우는 평일의 습작에서 연애를 제외할 수는 없는 일이다.
내가 연애에 대한 글을 쓴다면 필수적으로 짚고 넘어가야 할 개념은 바로 이거다. 귀염지옥! 귀여워보이는 순간 끝이라는 말을 들어봤는가? 이 말은 진리 중의 진리다. 한번 귀엽기 시작하면 끝도 없이 귀엽고, 작정하고 다퉈도 중간중간 귀여운 모습에 피식피식 웃음이 새어나오니까. 화를 내도 귀엽고 그냥 서 있어도 귀엽고 뭘 해도 귀여워지는 마성의 남자가 된달까!
나는 연상의 남자를 만난 이성애자 여성이다. 아마도 한국 사회에서 가장 흔한 연인 타입일 것이다. 다들 그렇듯 오빠라는 호칭으로 시작했고, 오빠 소리를 듣는 이성애자 남성이 다들 그렇듯 이 친구도 애인과 연애에 대한 알 수 없는 책임감으로 출발했다. 연상의 남자를 원하고 연하의 여자를 원하는 보통의 심리에 대해 할 말은 많으나, 끝도 없이 길어질 테므로 넘어가겠다. 어쨌든 나도 그들 중 한 명이라는 점은 변함이 없다. 실제로 뜽귱이 아닌 사람을 만났더라도 난 동갑 이상을 선호했을 것이다. 이건 취향의 문제다.
나는 운이 좋아 사고가 유연한 남자를 만났다. 이 친구가 아니었다면 연상의 남자를 만났을 때 꼭 타파해야 하는 가부장적 상황들을 종종 마주했을 것이다. 내 몇몇 친구들의 연애가 그랬다. 각자 서로 다르고 구체적인 문제들을 맞닥뜨렸지만 맥락은 같았다. 일종의 통제와 제한. 행동 또는 옷차림, 혹자는 커리어까지.
뜽귱이 위엄 차리는 성격이 아닌데도 우리 관계가 완전히 동등하고 편안해진 건 호칭이 변화했을 때부터다. 어느새부터인가 ‘오빠’라고 부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귀염지옥까지 때마침 열려주어서 기꺼이 빠져주었다. 그 이후로 나보다 3살 많은 뜽귱을 끔찍히도 귀여워하기 시작했다.
이제 뜽귱은 오빠라 불리면 묘한 표정을 짓는다. 그 호칭이 어색할 뿐만 아니라 호칭에 담긴 권력, 책임감, 위계질서가 우리의 모습과는 다소 어긋나기 때문이다. 오빠는 그런 단어다. 부르는 순간 의젓해야 할 것 같은 단어. 서로 귀여워서 디지려 하는 우리 사이의 메커니즘은 절대 담을 수 없는 단어다.
연애를 오래 끌어가면서 귀여움은 관계의 지속에 중대한 영향을 미쳤다. 나이로 위계질서를 계산하고 남녀의 권력이 유별한 한국 사회에서 연상의 남자와 연하의 여자가 만나면 얼핏 상하구조가 생길 수 있지만, 동등한 호칭과 귀염지옥이 우리 사이를 편평하게 다듬어주었다. 또 다툼을 상쇄하고 실수를 감싸주며 열심히 사랑을 표현하고 건네는 효과적인 방식이었다. 귀여움은 장기연애의 숨은 주역이다.
물론 나의 방식이 모두에게 맞는 건 아니다. 내 친구는 오빠라는 호칭을 종종 사용하면서도 무서운 결단력으로 애인을 이끈다. 나의 경우엔 오빠는 언제나 위에 머무르는 사람 같았으므로 그 그늘을 벗어나는 것이 비로소 온전한 연인 관계가 된다고 느꼈다. 적어도 오빠라고 부르는 사람은 귀엽게 애정할 수만은 없는 존재 같았다.
사랑의 유통기한은 길어야 3년이랬다. 도파민인지 옥시토신인지 사랑에 빠졌을 때 분비되는 호르몬의 유효 기간이 900일 정도란다. 우리는 그 한계를 돌파한 지 오래나, 즐거웁게 귀여웁게 잘 살아가고 있다. 도파민과 세로토닌은 3년으로 끝날 지 모르나, 귀여움은 빠져나올 수 없는 늪이다. 언제까지 가나 한번 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