엠지

by 희량

문득 내 평습이 엠지의 단상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를 구성하는 성질이 모두 엠지를 관통하는 것 같달까. 내가 지나온 교육환경, 내가 누리는 도시의 삶, 내가 향유한 문화, 내 사고방식 모두 엠지의 일면이었다. 실제로 내가 글을 쓰면서 가볍게 엠지를 언급한 적도 많고… 당연한 일이다. 엠지를 정의하는 세대에 내가 속하니까. 말하기에도 새삼스러운 사실. 난 엠지다.


나는 엠지란 말을 자주 쓰는 편인데, 용법은 두 가지다. 첫째, '나 그래도 엠지야'라는 식으로 요즘 애들 문화에 익숙함을 어필하며 아직 팔팔하다고 외치기 위한 말. 둘째, '너무 엠지 같니?', '엠지 한번 되어보자'라는 식으로 엠지의 어떤 되바라짐을 희화화하는 말. 날 엠지라 일반화하는 건 불쾌해하면서 누구보다 엠지 같음을 열심히 어필하고, 동시에 요즘 엠지들의 행태에 혀를 차며 스스로를 분리한다. 이런 모순적인 엠지를 보았나.


나는 엠지이지만, 엠지를 둘러싼 잘잘못과 호불호 사이에 미묘하게 끼어있는 존재다. 가장 모순적이고 복합적인 엠지라 말할 수 있는데, 기성세대의 사회적 약속을 잘 수용하면서도 신세대의 개방성과 융통성을 띠고 있기 때문이다. 초등학생이 화장이 웬 말이며, 선생님 말 잘 듣는 게 최고인 줄 알았던 순박한 시대에서 자랐다. 트렌드를 좇는 선두에 있지 않아 엠지의 방식을 나도 모를 때가 있고, 학교든 회사든 조직에서는 기성세대의 위계질서 속에서 눈치를 보느라 바쁘다. 반면, 세상을 이분법적으로 나누고 인생을 규격화한 기성세대의 기준에 드세게 반항했다. 고루하고 꽉 막힌 사고를 경멸하다시피 답답하다 여겼고, 내가 비정형적인 세상을 끌어안을 수 있음에 심취했다.


이 모순은 종종 어떤 가치 판단의 충돌로 이어지는데, 그때마다 나는 친구와 머리를 맞대고 고민한다. 예를 들어 이런 식이다.


교수님께 미팅을 미룰 수 있겠냐는 질문을 조심스럽게 드려놓고, 답장이 올 때까지 전전긍긍 앓는다. 이런 내 모습이 싫어서 친구에게 엠지이고 싶다고 말한다. 이때 엠지란 원하고 필요한 것을 똑부러지게 요청할 줄 아는 멋진 젊은이다. 상호 소통을 통해 모두가 편안한 방향으로 조율할 수 있음을 믿고 의심하지 않는다. 정확한 의사표현이 당연하고, 시도해보지도 않고 불편함을 감수하는 것이 미련한 일이라 믿는다. 효율 높은 삶의 방식이다.


이런 일도 있다. 친구가 회사에서 업무 중에 몰래 간식 먹는데, 직장 동료가 눈치 없이 큰 소리로 떠드는 상황이다. 조용히 하라고 눈짓을 보내니 뭐 어떠냐는 반응이다. 저 당당함이 밉상이 될 때, 우리는 엠지 같다고 말한다. 엠지가 되어야 세상 편하게 산다면서 욕 같은 칭찬을 한. 이럴 땐 아직 세상의 넓고 높은 부분을 구성하는 기성세대의 방식도 존중해야 덜 피곤하다고 생각한다.


엠지란 희한하지. 나도 엠지인데, 엠지 같지 않을 때가 있고, 엠지가 싫으면서도, 엠지를 동경하고 엠지가 되고 싶어 한다. 트렌드를 주도하는 세대는 거창해보여서 그 안에 속하고 싶지만, 젊은 세대가 늘 듣는 되바라지단 평은 내 성급함을 지적하는 것만 같아 엠지로부터 날 분리하고 싶어진다. 내가 되바라진 아이는 아니지 않나 하면서. 하지만 난 누구보다 되바라진 면모를 갖고 있고, 트렌드도 나름 잘 따라가고 있다. 새롭게 등장하는 신조어나 밈은 엠지 중에서도 가장 뒤늦게 알아차리는 것 같지만, 주변에서 소식을 물어다 날라주는 덕분에 끝까지 낯설진 않다. 결국 난 엠지에 둘러싸여있고, 엠지였다.


이게 ‘엠지’라는 용어로 새롭게 불려서 그렇지, 젊은 세대가 기존의 문화와 새로운 문화를 동시에 받아들이면서 겪는 자연스러운 모순과 충돌이라 느낀다. 옛 방식과 새 방식을 섞어서 현명한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다면 좋겠다만, 젊은이는 보통 유연하되 서툴고, 노인은 보통 연륜이 있지만 뻣뻣하다. 결국 소통이라는 진리의 결론에 다다르지만, 말이 쉽지. 어쩌면 이게 보수와 진보가 함께 뭉쳐 굴러가는 이상적인 방향일지도. 각자의 의견만 외치느라 떽떽거리는 것이 아니라… 아무튼 나의 젊음은 이리도 복합적이다.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노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