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통의 실재

by 희량

‘씨리얼’이라는 유튜브 채널을 구독하고 있다. 약자의 이야기를 자세히 조명하는 채널로, 자폐인에 대한 인터뷰를 계기로 구독하게 되었다. 외면할 수 없는 이야기를 풀어내는 곳이다. 지금껏 활자로만 읽어온 약자의 이야기를 생생한 말로 전달한다. 그 영상들이 가리키는 것은 분명하다. 이들은 ‘살아있었다.’ 그 실재를 마주한 순간은 강렬했다. 영상에는 ‘다양성’이라는 수단에 불과한 단어로 묶을 수 없는 거대한 존재가 앉아있었다.


사회에서 빛을 받지 못하는 지점들이 있다. 씨리얼에서 본 영상 중 가장 충격적이었던 영상은, 친족성폭력 피해자의 이야기였다. 친족성폭력이라는 다섯 글자는 이상하게 다가왔다. 실재할 수 있는 단어인지 가늠할 수 없어서 피부에 와닿지 않았고 허공에 부유하는 듯했다. 씨리얼의 영상은 상상할 수조차 없어 비현실적이었던 그 단어를 현실의 공간으로 끌어내렸다. 믿을 수 없게도 그 범죄는 어딘가에 존재했고, 피해자도 실재했다. 나와 같은 얼굴로, 나와 같은 목소리로 자신의 이야기를 꺼냈다.


그분은 자신의 이야기를 책으로 펴낸 작가님이었다. 이미 많은 세월이 흐른 뒤였다. 그분은 담담하게 이야기를 이어갔다. 이야기를 듣는데 온몸에서 거부 반응이 나타나는 것처럼 속이 메스껍고 가슴이 답답하고 마음이 아팠다. 온몸이 물 속에 가라앉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고작 이야기를 듣는 것만으로도, 심지어 이미 잘 극복해낸 어른이 담담하게 풀어내는 이야기를 듣는 것만으로도 힘겨웠다. 내가 쓰는 모든 글들은 삶에 대해 깊이 고찰해본 척이란 척은 다 하는데, 오만하고 방만했다. 내가 모르는 세상은 크고 거대했다.


그분을 감히 불쌍히 여길 수는 없었다. 불쌍하다는 감정에는 공감과 이해가 배제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된 후로 슬픈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내 감정을 조심스럽게 살펴야 했다. 나도 모르게 나를 분리하고 대상을 타자화할까 봐 걱정스러웠다. 깊고 복잡한 고통을 편평하게 만들어버리는 일은 너무 쉬웠다. 나는 고통스럽게 이야기를 들었다. 이 상태를 보통은 감정이입이라고 표현하겠지만, 완전히 나를 투영시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나는 청자에 불과했다. 분노가 고개를 들었지만, 누구를 향해야 할지 갈피도 잡을 수 없었고, 분노를 표현할 자격도 없는 것 같았다. 길 잃은 감정만 덩그러니 남았다.


내가 청자로서, 실제적인 경험이 아니라 이야기로서의 경험을 수용하는 입장에서 선명하게 느끼는 감정은 존경이었다. 고통을 겪고 극복하기까지의 모든 과정을 거치고, 같은 아픔을 가진 사람들에게 도움을 주며 살아온 그 행보의 무게에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었다. 나는 가늠할 수 없는 단단한 걸음이었다. 타인의 고통을 덜어내주기 위해 나서기까지 자신의 고통을 얼마나 밟고 다져야했을까.


인생은 곧 고통이라고들 말한다. 삶에 고통이 얼마나 굳건히 자리하고 있으면 모든 종교에서 평안과 행복은 내세에나 존재한다고 말할까. 이 세상이 웃음으로만 구성되지 않아 슬프다. 그러나 어떤 고통으로 인해 내가 당연하게 여긴, 심지어 불평까지 해온 일상이 기적적이고 감개무량한 일이었음을 깨닫는다. 나도 어느 누군가에게 작은 도움이 되길, 약간의 웃음과 소박한 따스함을 건넬 수 있길 기대한다. 그렇게 서로를 구제하는 세상이라 울음을 터뜨리게 된다. 세상은 웃음과 울음을 섞으며 살아가는 장소일지도 모른다. 그래도 아무도 지독한 고통은 겪지 않길 기어코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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