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겨진 내 모습

by 희량

야심차게 에세이를 시작했지만, 에세이는 무섭다는 것만 깨달아버렸다. 나와 내 주변을 가감없이 드러내는 글이라 부끄러웠다. 어느 누군가 내 평습 계정을 둘러보면 난 무방비하게 구석구석 들키고 말 것이다.


나는 유독 진지한 내 모습을 드러내길 거부해왔다. 학창시절부터 그랬다. 밝고 활발한 양지의 나는 열심히 드러내고 관심을 끌어왔으나, 진지하고 재미없는 음지의 나는 꼭꼭 숨겨왔다. 항상 비웃음을 예상했고, 그래서 더 감췄다. 공부하는 걸 좋아하고(싫어하는데 좋아함), 선생님의 질문에 따박따박 대답하고 싶은 지루한 모범생 버전의 나는 사랑 받지 못할 걸 알았다. 괜히 친구들이랑 투덜대고, 어려움을 과장하고, 너보다 내가 열등함을 자랑하며 호들갑을 떨어댔다. 그게 내가 사회에 녹아드는 방식이었다.


대학원생쯤 되니, 타인에 대한 무관심이 팽배해서 하고 싶은 대로 해도 될 것 같다는 생각이 조금씩 고개를 들었다. 어차피 아닌 척해도 나 열심히 사는 건 다 알았다. 이럴 바에는, 헤르미온느처럼 살아도 괜찮을 것 같았다. 최선을 다해 아는 척하는 그가 항상 부러웠으니까. 이번 학기부터 대놓고 앞자리에 앉았다. 교수님이 수업하면서 한두 번씩 퀴즈처럼 던지는 질문에 열심히 답했다. 이사도라 덩컨이 스카프 때문에 죽었다는 건 교실에서 나만 알고 있을 것 같았다. 이게 또 짜릿한 순간이다.


내 대답은 두 번으로 그쳤다. 나를 노잼 범생이로 보지 않았으면 하는 어린 마음이 아직 진하게 남아있었기 때문이다. 두 번 대답하고 나니까 자연스럽게 입을 다물게 되었다. 여기서 더 대답하면 차가운 눈총을 받을 것 같았다. 데페이즈망이 초현실주의의 표현 기법 중 하나라는 사실은 나만 대답할 수 있었을지도 모르는데!(의상학과에서는) 입 안에서 맴돌기만 하고 차마 뱉지 못했다. 쓰면서 보니까 난 정말이지 지적 허영심이 굉장한 사람임을 다시 깨닫는다. 대단한 소심함을 곁들인…


허영심과 소심함은 자주 충돌하는데, 내가 겪은 사회화는 언제나 소심함의 손을 들어주었다. 겸양이 미덕인 한국 사회의 규범과, 일진 문화의 지배 아래 나대서는 생존할 수 없었던 학교의 정치 규범 때문이다. (특히 여자아이가) 수줍게 대답하는 모습이 사회적으로 통용되었고, 규범을 수용한 나는 소심함으로 꾸며졌다. 그렇게 자란 나는 헤르미온느를 동경하기만 하고, 허영을 열심히 눌러왔다.


아니, 허영만으로 설명할 수는 없을 것이다. 나를 드러내고 싶은 욕구는 누구에게나 있다. 한 사람에게 인정 받길 원하든, 다수의 관심을 원하든, 자신의 강점을 자신 있게 드러내는 일은 누구나 필요하다. 자기 PR의 시대니까. 난 자기 PR이라는 현대 사회의 슬로건을 들으며 실패를 예감했다. 지금까지 진지한 내 모습을 숨겨오기만 했고 그 감춤에 익숙해져있는데 이제와서 드러내라니. 수업시간에 입술만 달짝이며 대답을 삼킨 것처럼, 나를 숨기고자 하는 마음은 자연스럽게 나를 통제한다.


음지의 나는 내 꿈과 미래에 더 맞닿아 있는 모습이기 때문에, 자기 PR은 더욱 쉽지 않은 일이다. 오히려 나는 내 글이 부끄러웠다. 글도 부끄럽고, 글에 욕심내는 것도 부끄러웠다. 내가 쓴 글 한 편을 인스타그램에 자랑하는 것만으로도 큰 용기를 그러모아야 했다. 늘 아무렇지 않은 척했지만 속으로는 진지한 나를 내보이는 것이 두려웠다. 누구는 자신의 꿈을 좇는 것에 파묻힌 나머지 부끄러운 줄도 몰랐다는데. 부끄러울 정신이 있다는 게 부끄러운 일이었다.


춤을 좋아하는 친구는 서툰 모습이더라도 당당히 춤 영상을 올리고, 애니메이션을 좋아하는 친구는 오타쿠라는 소리를 두려워하지도 않고 당당히 귀멸의 칼날 주인공 이름을 부르짖는다. 나도 받아들일 때가 되었다. 나는 많이 재미 없는 편이고, 딱히 내세울 것도 없는데 지성을 자랑하고 싶어 발을 종종거리고, 그러나 편안한 사람 앞에서는 한없이 까불고 설치는 사람이다. 억눌린 나는 해방시켜야지. “날 감춰야 했던 시간을 멈추고 언젠간 내 안에 날 만날 것 같아~” (숨겨진 내 모습 가사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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