괴물

by 희량

황정은 작가의 <계속해보겠습니다>는 7년 전에 읽고도 기억에 선명하다. 이야기가 전부 생생히 남아있는 것은 아니고, 한 장면이 유독 뚜렷하게 마음에 새겨졌다. 어항 속 금붕어를 자꾸 건드리고 괴롭히는 동생을 오빠가 때리고, 타인의 고통에 공감하지 못하면 괴물이 된다고 말하는 장면이다. 약간의 왜곡이 있을 수 있으나, 괴물에 대한 정의만큼은 정확히 기억한다.


패션 산업의 지속가능성에 대한 글을 쓰면서, 더 심각한 환경 오염과 더 잔인한 인권 침해 소식을 찾는 나를 발견했다. 순간 역겨웠다. 나는 그 불행을 이용해먹고 있는 게 아닌가? 더 주목할 만한 글을 쓰기 위해? 누군가의 고통에 안타까워하는 마음과, 글에 넣으면 적당할 것 같다는 판단 중 어느 게 먼저 떠올랐을까? 만약 후자가 앞섰다면… 괴물이 되는 일은 이렇게도 쉽다.


정희진 작가님의 팟캐스트에서 김건희 여사의 캄보디아 방문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 김건희 여사는 캄보디아인 아기를 품에 안고 사진을 찍었는데, 두 가지의 지적할 지점이 있다. 하나는 김건희 여사와 아이는 서로 다른 방향을 바라보고 있다는 점이다. 두 사람의 엇갈리는 시선은 둘 사이의 어떤 교감도 보여주지 않는다. 보통 시선의 마주침 속에 진심이 보이는데, 허공을 향한 두 시선은 공허했다. 또 다른 하나는 김건희 여사의 위치가 한 국가를 대표한다는 점이다. 만약 미국의 영부인이 우리나라의 환아를 안고 사진을 찍었다면 어떨까. 김건희 여사의 대표성 때문에 캄보디아의 아이에게도 캄보디아를 대표하는 성격이 생겼다. 마르고 아픈 아이의 모습은 캄보디아를 후진국으로 명명한다. 아무 잘못 없는 아이의 아픔을 국력과 연결시켜서 매우 미안하지만…


야당에서 이 사진을 두고 ‘빈곤 포르노’라며 비판했다. 정치적인 감정이 섞인 거친 표현이겠지만, 빈곤을 상업적으로 이용했다는 뜻이다. 관심을 끌고 이미지 메이킹을 위해. 관심을 바라는 현대인의 욕망은 자본주의와 연결된다. 특히 디지털 미디어의 세상에서 대중의 관심은 벌이로 연결되니까. 나도 다를 바 없었다. 글도 결국 주목 받고자 쓴다. 생존 수단이 되니 더 많은 관심, 더 많은 상업적 효과를 기대한다. 그래서 자꾸 자극적인 내용을 탐색하는 욕망의 눈빛이 있었다.


언젠가 일기에 중요한 이야기를 하는 사람이 되고 싶다고 쓴 적이 있다. 바쁜 일상 속에서 쉽게 지나칠 만한, 하지만 절대 잊으면 안 되는 세상의 부분을 힘껏 짚어내고 싶다는 마음이었다. 나는 잘 해낼 수 있다고 생각했다. 내 시선은 중요한 지점을 잘 간파해내는 것 같다며 자부했다. 하지만 정신 차리지 않으면 괴물이 되는 건 한순간이다. 금붕어에게 장난 치는 일이 금붕어에게 고통이 될 수 있다는 건 한층 더 깊이 생각하지 않고선 깨달을 수 없는 일이다. 내 글에 역겨움을 느꼈던 기분은 참담하다.


적당히 주목을 끌면서, 적당히 윤리적일 수 있을까? 중도는 찾기도 어렵고, 머무르기도 어렵다. 과연 존재하는 지점인지, 근본적인 의문도 든다. 그저 가운데 언저리에 위치하기 위해 이리저리 흔들리면서 진동하는 채로 머무르는 게 최선일지도 모른다. 그러려면 이쪽저쪽으로 밀고 당기는 힘이 수없이 필요하겠지. 그러니 항상 질문해야 하는 셈이다. 나의 위치와 방향을 생각하기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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