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록은 없어도, 기억은 남는다.
무계획의 로컬 걷기
오늘은 뭘 할지 특별히 정해둔 게 없었다. 그냥 쉬어볼까 하는 단순한 생각이 있었는데, 예상보다 일찍 눈이 떠졌다. 어제 해 뜰 무렵 걸었던 기분 좋았던 순간이 떠올랐고, 그 시간을 놓치고 싶지 않아 밖으로 나갔다.
어스름이 남은 자줏빛 하늘이 펼쳐지자, 내 마음도 서서히 열리기 시작했다. 몸도 마음도 차츰 살아나는 느낌이었다. 스페인에 왔으니 추로스 아침 한 번쯤 먹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걷다 보니 작은 츄레리아가 보였다. 겉으로는 소박해 보였던 츄레리아가 안으로 갈수록 작은 동굴처럼 깊고 아늑한 공간으로 이어졌다. 추로스와 포라를 주문한 후, 초코라테도 함께 시켰다. 현지인들처럼 추로스를 초코에 찍어 먹으며 그 순간을 즐겼다. 사실 나는 아침부터 밀가루 음식을 즐기지 않는데도 스페인에서는 그렇게 하기로 했다.
뜨겁게 튀겨낸 추로스는 겉은 바삭하고 속은 부드러웠다. 초코라테는 녹아내린 누텔라처럼 진득했고, 달콤한 향이 입안에 퍼지며 온몸을 따뜻하게 감싸주었다. 그러나 아침에 튀긴 밀가루를 초코라테에 찍어 먹으니 혈당이 확 올라가는 느낌이었다. 이걸 식곤증이라 하기엔 전날의 수면 부족도 겹쳤겠지만, 졸음이 몰려왔다. 문제는 방으로 돌아가지 못할 만큼 피곤했다는 것이다. 마침 눈앞에 지역 도서관이 보여 들어갔다. 어디 의자에 걸터앉아 멍 때리고 있으니 , 약간 잔 것처럼 피곤이 가셨다.
그 순간, 오늘의 걷기가 바로 내가 즐기는 로컬 걷기라는 것을 깨달았다. 호주 멜버른에서는 아무 버스나 타고 낯선 거리로 떠났다. 내렸던 그곳의 골목은 저마다의 이야기가 숨 쉬는 것 같았다. 독일 쾰른에서도 어딘지 모르는 곳을 걸으며 즐거웠던 기억이 있다. 하지만 그곳들은 두 번 다시 찾을 수는 없었다. 기록으로 남기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번에는 다르게 하기로 했다. 츄레리아도 저장하고, 도서관도 기록했다. 도서관 구석에서 전시회 도록도 챙겨 오고 사진도 찍었다.
여행은 계획되지 않은 순간에도, 그 즐거움을 뿜어낼 준비를 하고 있다. 여행의 진짜 매력은 소소한 순간들 속에 살아있다. 마드리드를 다시 올지, 아니면 이곳이 내 기억 속에만 남을지 알 수 없다. 하지만 순간의 여운은 내게 오래도록 남을 것이다. 순간을 간직하는 것이, 결국 내 여행의 목적이니까. 초등학교 시절 길 가다 만난 아주머니가 도와준 기억은 내게 남아 있지만, 그 아주머니를 다시 찾아갈 방법은 없는 것처럼. 비록 기록은 없어도 기억은 온전히 남는다. 그렇다. 나에게 여행은 눈앞의 풍경을 남기는 것뿐 아니라, 스쳐가는 순간의 의미를 되새기는 과정이기도 하다.
요즘은 모두가 기록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시대지만, 나는 여전히 내 방식대로 여행하고 있다. 시대는 달라졌지만, 나는 여전히 이렇게 여행을 기억하며 살아간다.
24.11.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