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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모미모미 MomiMomi Apr 02. 2020

참외와 아버지

벚꽃은 봄과 이별을 동시에 전해주었다.

참외와 아버지

심한 일교차에도 봄은 찾아왔다.

정오의 햇살은 한껏 움츠려 있던 계절에게서 드디어 봄꽃을 피워냈다. 전 세계가 바이러스 확산으로 우울감을 느끼는 일명 ‘코로나 블루 (Corona Blue)’에 시달리고 있지만, 영국 작가 데이비드 호크니 (David Hochney)가 그의 수선화 그림 한 점을 통해 전한 것처럼 그것이 우리의 봄을 취소할 수는 없었다.


어떤 예외적인 상황에도 계절은 때에 맞게 오고 간다.


<데이비드 호크니, 출처. 덴마크 루이지애나 미술관 인스타그램>

아침저녁 쌀쌀함이 가시지 않아 옷장 한편에 보류시켰던 겨울 외투들을 드디어 세탁소에 맡기는 것으로 나만의 봄 환영식을  치렀다. 모처럼 남편이 쉬는 토요일 오후 빨간 머리 앤 만화에 푹 빠진 아이들을 두고 남편과 장을 보러 나왔다.

아파트 화단에 단아하게 피어있던 노란 수선화와 터질 듯 말 듯 망설이고 있는 벚꽃이 우리 부부에게도 그 날이 다가오고 있음을 전해주었다.


9년 전 4월 벚꽃이 만개했던 어느 봄날

아버님은 마지막 꽃놀이를 보신 뒤 우리 곁을 떠나셨다.

첫 째 아이가 돌쟁이였을 무렵 오랜 기간 병상에 계셨던 아버님이 함께 벚꽃 구경을 가자며 우리를 부르셨다. 퇴원 후 누워 지내셨는데 그날따라 아버님이 기력을 찾으신 듯했다.


아이는 유모차를 타고 아버님은 휠체어를 타고 인생의 초년병과 고참이 나란히 서울대공원으로 벚꽃 구경을 향했다.


 “인생이 짧고도 길구나. 벚꽃이 피고 지는 걸 보니 우리의 인생도 파노라마 영화 한 편이었구나.”
 
아버님은 그 날이 이생에서 마지막 임을 알고 계셨던 것 같다. 저 짧은 두 문장을 유언처럼 남기고, 그 날밤 당신의 아들이 발을 주물러 드리던 걸 마지막 인사로 받고 눈을 감으셨다.

우리에게 벚꽃은 봄과 이별을 알리는 메신저다.


벚꽃을 보며 마트로 향한 우리 부부는 걷는 동안 말이 없었다. 둘 다 9년 전 그 날을 마음속으로 회상하고 있었다. 신호등이 초록으로 바뀌는 것을 기다리다 맞은편 트럭에 노란 과일들이 보였다. 참외였다.

“아버님이 참외를 무척 좋아하셨는데……시댁에 갈 때마다 참외를 사 들고 가면 아버님이  그렇게 좋아하셨는데……”

마트에서 장을 보고 돌아오는 길에 행상에서 참외 한 봉지를 사서 집으로 돌아왔다. 아이들은 올해 들어 첫 선을 보인 참외를 보더니 얼른 깎아달라고 군침을 삼켰다. 큰 아이는 씨앗을 뺀 참외, 작은 아이는 씨앗을 빼지 않은 채 참외를 달라고 했다. 단단한 과육에서 스며 나온 달콤한 맛을 느끼며 아이들에게 이야기했다.

“할아버지도 참외를 무척 좋아하셨어.”
“우리도 할아버지 핏줄이라 참외가 좋은가 봐요, 엄마. 이번에 곡성 갈 때 할아버지 산소에 참외 가지고 가요.”
“그럴까? 할아버지는 꽃도 좋아하셨어. 무슨 꽃이 좋을까?”
“그럼 제가 종이로 수선화 꽃을 접을게요. 종이접기 책에서 봤어요.”

아버님은 돌아가시기 전에 당신이 봄에 돌아갈 거라는 걸 알고 있었는지 늘 이렇게 말씀하곤 했다.


“내가 죽거든 화장해서 곡성 밭에 뿌리고, 너희들은 봄놀이를 다녀가는 길에 나를 잠시만 기억해주면 좋겠구나.”


아버님의 유언대로 매년 4월 곡성으로 봄놀이를 간다.


당신의 기일 날을 통해 봄을 선물하고 싶었던 아버님의 마음을 알기에 우리는 남도의 봄을 만끽한다. 봄과 함께 아버님을 마음 가득 담아 돌아온다.


생전에도 그랬고 돌아가신 후에도 아버님은 쿨 하셨다. 죽음이라는 무거움도 봄이라는 이름으로  자식들의 무게를 덜어 주고 싶으셨을 것이다.


아버님이 돌아가시고 난 후 유품 정리를 하다 평소 쓰시던 일기장을 보았다.

일기장에는 남편으로서 아버지로서 아들로서의 일생의 고민과 번뇌가 가득 담겨 있었다. 긍정적이고 진취적이었던 아버님의 외면만 봐왔던 터라 일기장의 묵직한 내용이 한동안 가시지가 않았다. 중공업 하청업체에서 박봉으로 일하면서 4남매를 연이어 대학까지 보냈으니 그 인생의 무게를 자식들이 짐작이나 할 수 있을까?

10여 년 전 서울에 처음으로 우리 힘만으로 집을 마련하고 무척 힘든 시기가 있었다. 설상가상으로 경제위기와 수도권 부동산이 얼어붙으며 손 절매를 해야만 했던 상황에서 우리 부부는 부모님을 원망하기도 했다. 주변에 부모님 도움 없이 집을 마련한 사람을 거의 보지 못했고, 힘든 시기에도 부모님의 재력은 위기를 버티는 버팀목이 되는 걸 이웃에서 자주 봤다. 적어도 우리에게 서울 집이라는 것이 그랬다. 부의 대물림 없는 사람들에게는 서울의 집을 쉽게 허락하지 않음을 온몸으로 겪었다.  

아버님의 일기장을 보며 우리가 위기를 겪어내고 있을 때 도움을 주시지 못했던 부모님을 마음속으로 잠시라도 서운해했던 것을 사무치게 후회했다. 아버님의 일기처럼 자식에게는 늘 뭔가를 내어 주고도 부족한 그 무엇인가를 멍에처럼 지고 있는 것이 부모의 삶인 것을 아이를 길러보니 알게 되었다.

딱 우리 부모님만큼 우리 아이들을 키울 수 있다면 좋겠다.


가난과 역경의 소용돌이에서도 한 번도 무너지지 않으셨던 부모님. 성실과 최선이라는 세상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가치를 남겨주신 부모님. 변치 않는 믿음으로 우리를 오롯이 스스로 설 수 있는 사람으로 길러내신 부모님.

나는 지금 아이들에게 어떤 무형의 가치를 전달하고 있을까?
조금만 피곤하면 그 피로를 아이들에게 투사하는 심약한 내 자신이 부끄럽다.
모든 짐을 홀로 진 채, 남겨진 자식들에게 봄을 선물하고 가신 아버님의 뒷모습이 안쓰러우면서도 부럽다.


부모님만큼의 부모가 되기는 어려울 것 같다.
하지만,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것을 생각해본다.

유산이나 강인한 부모의 뒷모습은 어려울지라도 아이들에게 추억을 남겨주고 싶다. 아버님이 그랬던 것처럼 먼 훗날 인생의 마디마디에서 부모를 떠올리며 힘을 받을 수 있는 그런 추억을 남겨주고 싶다. 조금이라도 어제와 다른 오늘의 삶을 살려는 시도들을 아이들에게 남겨주고 싶다. 우리가 놓지만 않으면 결코 우리 곁을 떠나지 않는 희망이라는 소식을 전해주고 싶다.

오늘이 아이들과의 지구여행에서 추억 한 조각이 될 수 있도록 더 많은 사랑과 더 많은 행복을 선택해야 하는 나의 삶의 이유를 알려주고 싶다. 내가 지금 행복을 선택할수록 아이들도 앞으로 펼쳐질 자신들의 인생에서 더 많은 행복을 선택할 테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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