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나 허니야, 음식이란 단어도 쓸 줄 알고, 우리 허니 형아 다됐네! 허니는 무슨 음식이 먹고 싶을까?” 여섯 살 배기 아들이 유치원을 다녀와서 냉장고를 열어보더니 엄마의 음식이 먹고 싶단다. 조그만 아이 입에서 음식이란 단어가 나오는데 왜 이리 귀여운지. 먹을 것 없냐고 묻는 게 아니고 음식이 먹고 싶단다. 그것도 엄마의 음식이. 아들에게 엄마의 음식이란 어떤 의미일까? 음식은 단순히 먹을 것 이상의 특별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나에게 음식은 누군가의 향기가 떠오르는 대상이고 추억이다.
나는 김치를 좋아한다.
그냥 좋아하는 것이 아니라 없으면 못 살 정도로 좋아한다. 특히 아주 발효가 잘 되어 시디 신, 그래서 양쪽 눈이 감기는 푹 익은 김치를 좋아한다.
신 김치는 나에게 있어 엄마이다. 엄마는 소문난 요리 대장이었다. 특히 김치를 잘 담그셨다. 장사를 하느라 바쁜 와중에도 늘 종류별로 다양한 김치를 손수 담갔고 시골 동네 한가운데 위치했던 우리 오뚝이 빵집의 김치 담그는 날은 김장철이 아니어도 그야말로 이웃집과 조촐한 잔치를 하는 날이었다.
푹 삶은 수육에 기다랗고 새빨간 배추김치를 돌돌 말아 한입에 가득 넣고선 오뚝이 김치 솜씨는 최고라며 왁자지껄 웃던 아주머니들이 떠오른다. 엄마는 손이 커서 한 번 김치를 담글 때마다 많은 양을 담갔지만 이웃과 친척들을 나누어 주고 나면 금세 동이 나곤 했다. 어린 시절 우리 집 부엌의 풍경을 그림으로 그리라고 한다면 커다란 소쿠리에 소금에 절인 배추가 서로의 등에 어부바하고 있는 그 모습을 빼놓을 수가 없을 것이다.
아침에 눈을 떴을 때 전날 밤 언덕처럼 쌓여있던 배추가 밤새 절인 배추로 변신해 있었다. 밤새 빵 재료뿐만 아니라 김치 재료 준비로 밤새 한잠도 못 주무셨겠구나 알게 됐던 건 시간이 한참 지나 내가 엄마가 된 후였다. 김치는 엄마의 음식이자 화해를 떠올리는 음식이기도 하다.
내가 우리 둘째 나이 즘이었을까? 빵 가게 구석에 걸려있던 커다란 전신 거울을 보고 탬버린을 흔들며 신나게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그런데 어찌 된 일인지 커다란 거울이 갑자기 나를 향해 오더니 나를 통과하고 와장창 산산조각이 났다.
딸이 크게 다친 줄 알고 놀라서 뛰어온 엄마는 나를 여기저기 살펴보시고는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다행히도 손끝 하나 다치지 않았다. 그렇지만 생각보다 엄마가 많이 놀랐다. 엄마는 그 자리에 주저앉아 갑자기 울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다치지 않아 다행이던 안도의 한숨이 야단으로 바뀌었다.
“아영이 너 위험하게 거울을 만지면 어떻게 하니? 엄마가 위험한 건 만지지 말랬지?”
“나는 거울 안 만졌어. 그냥 거울이 저절로 떨어졌어!” 엄마는 가만히 있는 거울이 어떻게 저절로 떨어지냐며 나의 말을 믿지 않았다. 하지만 나는 정말 거울에 손끝 하나 대지 않았다.
늘 내 편이라고 생각했던 엄마가 나를 믿어주지 않는다는 건 어린 마음에도 무척이나 속이 상하는 일이었다. 그리고 그때 거울이 아래로 떨어진 것도 아니고 왜 나를 향해 쏟아지듯이 떨어졌는지는 설명할 수가 없었다. 손님을 맞느라 바쁜 엄마를 뒤로 하고 동네 이곳저곳을 배회했다. 뒷산에도 가고, 언니가 다니는 초등학교에도 가고, 향교에도 가고, 교회 놀이터에도 갔다.
늘 경쟁이 치열해 타지 못했던 그네가 비어있었다. 그네를 차지하고 힘차게 발을 구르며 하늘 높이 다다랐지만 전혀 재미있지가 않았다. 엄마를 향해 화가 잔뜩 나있는 내 마음이 풀리지 않았다. 꽤 오랜 시간을 혼자서 여기저기 다녔다. 그런데 집에 돌아가기가 싫었다. 날이 어둑해져 더 돌아다닐 곳이 없어지자 마지못해 집으로 발걸음을 돌렸다.
가게 안을 들여다보니 엄마는 손님들 틈에서 정신이 없어 보였다. 집안으로 들어가기 싫어서 가게 앞 휴지통 옆에서 앉았다. 그러다 나도 모르게 유리문에 기대 잠이 들었다. “아영아, 하루 종일 혼자서 어딜 다닌 거니? 아이고, 울 애기 얼마나 배고팠을까?” 가게 앞에서 잠든 나를 엄마가 깨워 품에 안고 있었다. 엄마가 나를 ‘울 애기’라고 부르는 걸 좋아했다. 아기는 아니었지만 왠지 아기라는 소리가 좋았다.
엄마는 나를 무릎에 앉히고 신 김치를 쭉쭉 손으로 찢어 뜨끈한 밥 위에 얹어서 먹여 주었다. 온종일 여기저기 걸어 다니느라 배가 고프고 속상했던 마음이 밥 몇 숟가락을 입에 집어넣자 스르르 녹아내렸다. 엄마가 먹여 주었던 신 김치의 시큼하고 짙은 향기 뒤로 깨진 거울에 대한 이야기는 사라져 갔다. 아이를 키우면서 그때의 엄마의 마음을 조금씩 알게 되었다.
아이가 위험해지면 엄마에게는 여러 가지 감정이 한꺼번에 몰려온다. 아이가 다치지 않았을까? 아이가 얼마나 놀라고 아팠을까? 혹시 내가 부족했던 건 아닐까? 이런 복합 감정 속에서 그간 쌓여 있던 감정까지 손을 잡고 솟아오를 때가 있다.
깨진 거울을 보고 놀라 뛰어오던 엄마의 마음에 얼마나 많은 생각들이 스쳤을지 엄마가 되고 나서 알았다. 미국에서 공부하던 시절, 나는 셰어 하우스에서 지냈다. 셰어 하우스는 함께 돌아가면서 저녁을 준비하고 함께 먹는 룰이 있었다. 크리스천이 함께하는 셰어 하우스였고 공동체가 함께 음식을 나누는 시간을 강조하였다.
하우스 지하에는 음식 저장창고가 있었다. 우리는 매달 돈을 모아 공동의 음식 재료를 사서 그 창고 냉장고에 가득 채웠다. 그 일은 하우스 매니저라고 불렸던 미국 친구가 담당했다.
처음 셰어 하우스에 도착했을 때 매니저 친구가 나에게 물었다.
"너에게 필수 음식은 뭐야?"다른 건 몰라도 필수 음식은 내가 재료 쇼핑할 때 꼭 사다 줄게."
그때 나는 `김치`라고 대답했다. 그 친구는 쇼핑할 때마다 김치 더 필요하냐고 물었다. 서양인들이 김치 냄새를 좋아하지 않는다는 걸 알았기에 친구에게 물었다.
“네 차 트렁크에 김치 냄새 밸 텐데 괜찮겠어?”
그 친구는 고맙게도 이렇게 대답했다.
“It’s OK. Kimchi is special food to you. Isn’t it?” 그러면서 자신에게도 스페셜 푸드가 있다며 어린 시절 이야기를 전해 주었다.
친구에게 스페셜 푸드는 빵 반죽이었다.
그것도 익히지 않은 빵 반죽 말이다.
어떻게 익히지 않은 빵 반죽을 먹냐고 했더니 그것은 맛으로 먹는 게 아니고 엄마에 대한 추억으로 먹는 거라고 했다. 매니저 친구의 엄마는 늘 저녁 식사 후 디저트로 브라우니나 쿠키를 만들어 주었단다. 엄마가 빵 굽는 준비를 할 때 옆에 서서 반죽 한 귀퉁이를 떼서 맛을 보았단다.
내가 어린 시절 엄마가 나물을 무칠 때나 김밥을 만들거나 김치를 담글 때 옆에 서서 이것저것 집어 먹었던 추억과 겹쳤다. 이 미국 친구에게도 엄마의 음식 준비시간이 애틋하게 남아 음식을 먹으며 엄마에 대한 추억을 함께 먹는 것이구나. 생각이 들었다. “Do you want some?”
이렇게 친구와 어린 시절 엄마에 대한 추억을 나누면서 나는 생 밀가루 반죽을, 그 친구는 신 김치 한 조각을 맛보았다.
친구의 엄마를 만나 본 적은 없지만, 반죽 한 귀퉁이를 먹어보며 달콤한 빵 굽는 냄새가 나는 친구의 엄마를 느낄 수 있었다. 친구는 sour kimchi의 발효된 냄새가 좋다면서 연신 물을 들이켰다. 음식은 우리의 몸 구석구석에 에너지와 생기를 불어넣는다. 특히 엄마가 해주는 음식은 뭔가 더 특별한 것이 들어있다.
누군가 말했다. 음식에는 준비하는 사람의 모든 것이 들어있다고. 내가 힘들거나 엄마가 그리울 때 신 김치를 떠올리며 새로운 힘을 채웠듯이 우리 아이들에게도 힘을 줄 수 있는 추억의 음식을 만들어 주고 싶다. 세월이 흘러도 음식이 주었던 행복이 넘어진 아이들을 다시 일으켜 주고, 마음을 덥혀주는 따스한 불빛이 되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