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체성을 대여하는 시대

유통되는 이름표를 나에게 붙이면 난 그게 될까요.

by RayShines

결국 삶은 내가 누구인지를 찾아나가는 과정일 것입니다. 그리고 아마도 내가 누군지 알아야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결정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 두 과정 모두 쉽지가 않고, 오랜 시간이 걸립니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자신의 정체성을 찾고 싶습니다.

인간은 내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고 싶어 합니다. 내 삶의 목적이 무엇인지, 그 목적을 이루려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도 궁금해합니다. 그래서 여러 가지 시도를 합니다. 그중 가장 흔한 방식이 어떤 집단의 일부가 되는 것입니다.


집단은 많은 것을 제공합니다.

만약 영적인 가치를 지향하는 집단이라면 내가 어디에서 비롯되어 삶의 끝에는 어디로 가는지에 대한 서사를 만들어 줍니다. 우리의 삶이 그저 무작위 사건의 연속이며, 삶이 끝나고 나면 아무것도 없는 절대적 무라는 생각은 우리의 삶을 보잘것없는 것으로 느껴지게 할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리고 내가 나의 삶에 아무런 영향을 미칠 수 없다는 무력감에 빠지게도 합니다. 이는 우리를 허무주의의 늪으로 밀어 넣을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집단에서 내 존재의 시작과 끝을 설명해 준다면 마음이 한결 편해질 것이 분명합니다.


또한 집단은 개인에게 삶의 코드를 제시하기도 합니다.

아침 식사로 무엇을 하고, 어떤 정당을 지지하고, 어떤 경제적 결정을 내려야 하는지에 대해서 속속들이 알려줄 수 있습니다. 이제 세상의 변화는 너무나도 빠르고 공동체적 결속은 느슨해졌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불안감을 느낍니다. 어떻게 사는 것이 맞는지 일일이 결정 내리기가 무섭고 두려울 수 있습니다. 그럴 때 “이렇게 사는 것이 옯다!”라고 누군가 말해준다면 그걸 따르면 됩니다. 더 이상 두려움은 느껴지지 않을 것입니다.


인간은 기본적으로 외로움을 느끼는 존재입니다.

전통적 가치관의 붕괴와 경제적 양극화는 개인을 뿔뿔이 흩어지게 만들었습니다. 불안과 외로움은 서로를 더 활활 태우는 연료가 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무엇이라도 찾고 싶은 마음이 들 수 있습니다.


만약 이럴 때 내가 누군지, 어디로 가는지 명확하게 안다면 혼란감이 덜 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누구도 내가 누군지 명확하게 알 수 없습니다. 그래서 어떤 경우 우리는 유통되고 있는 정체성을 빌려오기도 합니다.


내가 사용하는 휴대전화의 브랜드, 내가 고집하는 식단의 종류, 내가 주로 활동하는 인터넷 커뮤니티, 내가 좋아하는 밴드나 그룹 등이 아마 그 예가 될 것입니다. 종교나 지역 같은 거대한 것들로 나를 규정할 수도 있지만, 이제는 작은 이름표 여러 개의 조합이 나를 규정하기도 합니다.


나와 동일한 정체성 조합을 가진 사람들을 예전에는 찾기가 거의 불가능했을 것이지만 이제는 SNS에 해시태그 몇 개만 달면 동료들을 찾을 수 있습니다. 동료들의 존재는 나의 정체성을 더욱 공고히 할 수 있습니다. 더 이상 혼자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 과정 전체가 문제라고 말하는 것은 절대 아닙니다. 이런 과정을 통해 인간은 내가 누구인지를 알게 될 테니까 말입니다. 하지만 한 가지 생각해봐야 할 것은 전후가 전도되는 상황입니다.


내가 이런 사람이기 때문에 나를 OO라고 규정하는 것과 내가 시중의 아이덴티티 중 OO로 나를 설명하기로 결정했기 때문에 그 코드에 맞춰 행동하는 것은 다릅니다. 전 전자는 옳다고 생각하지만 후자는 가치가 전도되었다고 생각합니다.


무비판적으로 어떤 정체성이 주장하는 가치를 그대로 수용하고, 그것에 따라 말하고 행동하는 것은 위험할 수 있습니다. 시류에 휩쓸리기 쉽고, 정치적으로 이용당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그 정체성의 유통 기한이 다 했을 때 새로운 정체성을 또 대여해야 하는 일이 벌어질 수도 있습니다. 이것은 결국 혼란감을 증가시킬 뿐입니다.


적극적이든, 소극적이든 탐색은 필요합니다. 하지만 결국 한 인간의 정체성과 가치관은 내가 가진 것들, 결정 내린 것들, 내가 한 생각과 말들의 총합체가 아닐까요. 이것은 외부에서 빌려올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내부에서 스며나가는 것이라는 게 제 생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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