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을 떠받들던 두 기둥의 균열
과거 세상을 지탱하던 강력한 힘은 종교였습니다. 그리고 인간을 치료하는 가장 강력한 도구는 의학이었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이 두 가지가 조금씩 힘을 잃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세상은 개인이 혼자 살아내기 무서운 곳입니다. 예측할 수 없는 일이 너무나 많고, 불가항력적인 일도 너무 많이 벌어집니다. 특히 천재지변은 인간이 얼마나 나약하고 보잘것없는 존재인지 여실히 보여줍니다. 그래서 인간들은 규합했고, 자신들을 하나로 결속해 줄 뭔가를 찾아냈던 것 같습니다. 개인적으로 전 그것들 중 하나가 종교가 아닐까 합니다.
종교는 내가 어디에서 왔고, 왜 왔고, 누구와 어떻게 살아야 하며, 마지막에는 어디로 가는지에 대한 답변을 제공합니다. 그리고 그 표현 방식이 매우 견고하며 의심의 여지 자체를 원천봉쇄하기 때문에 우리의 혼란감을 일거에 해소해 줍니다. 그래서 인간이 종교를 갖는 것은 어찌 보면 자연스러운 일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종교가 존재함에도 혼란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개인들은 있어 왔습니다. 그리고 세상이 너무 빨리 변화하며 경전에 쓰여 있는 내용들로 현실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지 않을까 하는 의심을 가지는 개인들의 숫자도 늘어난 것 같습니다. 종교가 해결하지 못하는 문제를 해결하려고 했던 과학은 인간의 무지의 깊이를 확인했을 뿐 완전한 대안은 되지 못했습니다. 속도에 압도된 우리의 혼란감은 더 심해졌습니다.
종교가 형이상학적이고 추상적이며 근원적인 문제를 해결한다면 의학은 형이하학적이고 물리적이며 현실적인 문제를 해결하려고 합니다. 인간의 육체는 쇠락하고, 마모됩니다. 의학은 이를 예방하고, 치료하는 도구로서 작동해 왔습니다. 그리고 어느 정도는 그 역할을 잘해왔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오랜 기간 의사와 환자 사이에 존재해 왔던 정보의 비대칭성이 결국 의학의 발목을 잡은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이제는 의학적 지식뿐 아니라 모든 지식이 흘러넘치는 시대입니다. 그리고 누구나 정보에 간단하게 접근할 수 있습니다. 꼭 의학서적이나 논문을 읽지 않아도 AI가 최신지견을 모두 정리한 뒤 포장해서 제시해 줍니다. 정보의 비대칭성은 완화되고 있습니다. 이제 의학은 일종의 공공재가 되었고, 그것을 실행하는 의사에 대한 신뢰는 희박해지고 있습니다.
종교와 의학에 대한 불신은 개인들의 마음에 거대한 공동을 남겼습니다. 무엇인가가 그것을 채워 넣어야 합니다. 허무와 무지는 우리를 더 불안하게 하니까요. 예전처럼 강력한 결속력을 가진 지역 공동체가 있다면 이런 부분이 어느 정도 상쇄됐겠지만 이제는 국가에 대한 소속감도 미약해지는 시대입니다. 그래서 그 자리를 여러 가지 세밀한 공동체와 정체성이 채워 넣고 있습니다.
특정한 형태의 식단, 특정한 방식의 운동, 특정한 시스템을 갖춘 비즈니스 등이 그 예가 아닐까요. 이제는 운동이나 식단, 판매 형태도 하나의 라이프 스타일이 되는 듯합니다. 단순히 내 생활의 일부로서 그것을 한다는 것이 아니라, 그것에 맞추어서 내 삶과 생각과 신념을 재배열하는 느낌이 듭니다. 그리고 “나는 이런 사람인데 이것을 해”라는 귀납적인 방식이 아니라, “나는 이것을 하기 때문에 이렇게 생각하고 행동해”라는 연역적 방식으로서 삶을 재조정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이것이 나쁘다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누구나 삶의 코드가 필요합니다. 어떻게 살아야 맞는 것인지, 어떤 결정이 나다운 것인지를 고민하지 않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럴 때 “이게 맞아”라고 말해주는 누군가가, 혹은 어떤 단체가 있다면 그 말을 따르고 싶지 않을까요.
기존에 세상을 떠받치고 있던 가치의 기둥에 균열이 생기자 개인들은 자신의 세상이 무너질까 하는 공포와 불안에 휩싸이고 있습니다. 무엇이든 그것을 대체할 수 있다면 그것을 선점하고 싶은 생각도 들 것입니다. 그러면 정체성을 확보하고 공고해진 나 자신을 느낄 수 있을 테니까요.
이는 분명히 한 번 깊이 생각해봐야 할 문제입니다. 내가 어떤 모습으로 어떤 나라에 태어났는지는 내가 결정할 수 없었지만, 내가 나 자신을 누구로 볼지, 어디에 속할지는 내가 선택할 수 있으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