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조적 관심
누군가의 아픔에 공감하는 것은 분명 좋은 일입니다. 공감이 타인을 돕는 것의 시작이 될 수도 있으니까요. 하지만 공감에서만 끝난다면 그보다 더 공허한 일은 없을 것입니다.
타인에게 공감하는 것과 관련되어 여러 가지 용어들이 있습니다. 공감(sympathy)은 우리가 타인의 고통을 이해하지는 못해도 안타깝게 여긴다는 의미로 많이 쓰입니다. 감정이입(empathy)은 우리가 타인의 고통의 원인을 살펴보고, 그의 관점을 취한 뒤 그의 입장이 되어 그의 고통을 이해하는 행위까지를 의미합니다. 연민(compassion)은 우리가 타인의 어려움에 공감, 감정이입을 한 뒤 실제로 그를 돕게 되는 행동까지 이르렀을 때를 지칭합니다.
언론이나 일부 주요 인물들이 그렇게도 강조하는 공감은 사실 타인의 고통에 공명하는 방식의 스펙트럼에서 가장 말단에 위치할 뿐입니다. 조금 과장되게 이야기하면 공감은 “아 저 사람 힘들구나…”하고 마는 것에 가깝다는 것입니다.
공감의 가장 큰 문제는 그 자체가 하나의 선한 행위로 느껴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공감을 한 사람은 난 공감을 했으니 내가 할 일을 끝냈다는 완결감을 느끼게 되기 쉽습니다. 기아에 허덕이며 배가 불룩해진 아프리카의 아이들을 보고 “아 너무 마음이 아프다”하고 느끼고 나면 “난 참으로 선하고 도덕적인 사람이구나”라고 생각하며 자신의 도덕적 허영을 채워 넣고 끝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아주 오래된 연구이기는 하지만 흥미로운 논문이 하나 있습니다. 1994년 낸시 아이젠버그는 참가자들에게 가난으로 고통받는 아이들의 영상을 보여준 뒤 심박수의 변화를 체크했습니다. 우리는 힘들어하는 아이들을 보고 깊이 공감, 감정이입하며 내 일처럼 여겨 심박수가 증가하는 사람들이 그 아이들을 도울 가능성이 높을 것이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결과는 정반대였습니다.
오히려 심박수가 떨어지는 사람들이 아이들을 도울 가능성이 더 높았던 것입니다. “고통스러워하는 타인, 더구나 그런 아이들을 보며 마음이 안정되다니, 이게 냉담이 아니라면 뭐란 말이야”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고통 속에서 허우적거리는 아이들을 보고 심박수가 급격히 상승한 사람들은 그 고통을 정말 나의 고통으로 여기게 되기 쉽습니다. 아주 깊이 공감, 감정이입한 것이지요. 누군가의 고통을 보는 것 자체가 나에게 불안, 절망, 공포를 느끼게 한다면 인간은 일단 내 문제부터 해결하겠다는 결론을 내기 쉽습니다. 고통을 느끼고 있는 사람을 돕는 것은 뒷전이 된다는 뜻입니다. 나부터 살고 봐야 하니까요.
그런데 심박수가 떨어지는 사람들, 우리가 냉담하다고 오해하기 쉬운 사람들은 이와 반대입니다. 상대의 고통으로 인해 생리적 반응이 일어날 정도의 고통을 느끼지 않기 때문에 오히려 상대의 입장을 이해하려는 인지적 노력에 심리적 자원을 부담 없이 할당할 수 있고, 그 결과 실질적인 조력 행동을 하는 연민까지 이어질 수 있습니다.
이런 태도를 관조적 관심(detache concern)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초연적 염려 정도로 표현할 수도 있겠습니다. 고통받는 상대에게서 detached, 즉 어느 정도 떨어져 거리를 유지할 때 오히려 타인을 돕는 행동을 할 가능성이 높아진다는 것은 우리의 직관과는 반대됩니다. 그리고 우리가 그렇게도 강조하는 공감이라는 것이 현실에서는 얼마나 무력한지를 보여줍니다.
동정은 값싼 것이라는 말을 합니다. 여기서 동정은 아마도 공감을 의미하는 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저도 이 말에 동의합니다. 그저 “저 사람 힘들겠네”라고 생각하는 것은 대부분의 사람이 할 수 있습니다. 그리 큰 힘이 들지 않고, 비용도 발생하지 않습니다. 누구나 할 수 있고, 어디든 널려 있는 것이라면 값어치가 비쌀 리 없습니다.
그렇다고 공감이 무의미한다는 것은 아닙니다. 세상에는 공감조차 하지 못하는 이들도 많습니다. 타인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려는 노력을 전혀 하지 않는 이들도 많습니다. 그런 관점에서 보자면 공감이라도 하는 것이 어디냐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공감에서 끝난다면 그 공감은 공허한 것, 무의미한 것, 그리고 값싼 것이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