낡은 우산을 든 사내가 빗속을 걸어온다. 그 사내, 비를 피할 생각도 없어보인다. 당신, 무슨생각을 그리 골똘히 하며 걷는가? 그의 심연으로 들어가면 아주 복잡한 미로 속에 작은 소녀가 보인다. 주름살 가득한, 노인에 가까운 사내의 가슴에 있기에는 너무 어린 소녀. 조금 더 들어가보도록하자. 그 소녀의 이름은 은서, 은서는 그와 무슨 관계일까. 젊은 얼굴을 한 사내가 보인다. 분명 빗속의 사내가 맞지만 확연히 다른 분위기가 느껴진다. 싱그러운 젊음과 무엇이든 할수있다고 믿는 바보같은 치기가 젊은 사내의 얼굴을 더 젊게보이게한다. 찬란한 사내가 사랑했던 여자구나. 은서는... 그래 그 사내의 가슴속의 은서를 엿보려한다. 은서는 환히 웃고있다. 잘 보이지 않는곳의 은서는 아주 슬픈 얼굴을 하고있다. 여기도 그 사내의 가슴 속 방에서 무척이나 구석진곳에 있는걸 보아하니. 그는 우는 얼굴을 한 은서가 자신의 머릿속에서 쉽게 떠오르지 않게 하기 위해. 이 방을 시작으로 더 많은 방을 만든것 처럼 보였다. 근데 저 눈물짓는 표정하나로 이 많은 방을 다 짓기에는 슬픔의 연료는 부족하지않은가? 제 아무리 감수성이 풍부하대도. 사내 대장부가 여자의 눈물에 그리 쉽게 무너져 이런 흉측한 건축을 심장에 지었을리 만무하다. 자고로 사내의 가슴이란 넓은 초원처럼 단순할수록 좋은것이아닌가? 나는 더 숨은 방을 본다. 더 더 깊숙히. 깊은 다락방 속에 은서가있다. 교복을 입고 목을맨채로. 그것보다 더 깊숙한방이 있을거라곤 생각못했다. 어린 소녀가 목을 맨 장면보다 더 숨기고 싶은것은 무엇인가. 대체 무엇이 튀어나오는게 가장 두려운것인가. 나는 사내의 두려움을 목도했다. 그것은 실로 끔찍하고 처참했다. 그 사내는 낡은 우산도 쓸 자격이 없었다. 거센비가 퍼부어 그 사내의 몸이 다 찢어져도 사내는 그 끔찍한 기억은 절대 지우지 못할것이다.
그래 나는 내가 사랑하던 여자 은서를 죽였다. 은서는 절대 양립할수없는 두가지를 동시에 가진 존재였다. 그녀는 내 가슴을 설레게하는 여자이자, 절대 그래선안돼는 나의 제자였다.
무릇 그때쯤 조금 성숙하고 어여쁜 외모를가진 계집들은 동갑의 남자애들은 유치하고 시시하기 마련이다. 나는 그런 계집들의 틈을 알고있었다. 은서를 내 품에 안는건 어려운일이 아니었다.
다시 늙은 사내가 보이기 시작했다. 나는 그 우산을 뺏어들고 그를 마구 패기 시작했다. 그는 자신의 죄를 아는듯이 가만히 맞고있었다.
그래. "넌 한마디도 않고 벌을 받는구나. 대체 넌 무슨죄를 지었는가? 그 늙고 추악한 입으로 너의 죄를 발설하라" 나는 소리쳤다. 그는 끝내 자신의 죄를 발설하지 못했다.
그렇다면 나는 확성기가 되어 너의 귀에 너의 죄를 때려박을수밖에. 그 순간 그 사내의 심연에 몇천개의 방이 지어지기 시작했다. 은서의 방으로 가는 길은 점점 더 고난도의 미로로 변하고있었다. 사내는 자신의 가슴속에서 청년의 모습으로 은서의 방에서 가장 먼곳으로 도망치고있었다. 그러나 그의 방의 입실률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은서들은 방에서 뛰어나와 그를 쫓기 시작했다.
그리고 마침내. 교복을 입은 은서가 젊은 사내 앞에 섰다. 이 순간을 바라볼수없던 늙은 사내는 끝내 자신의 눈을 찔렀지만. 그 둘의 모습은 사내의 가슴팍위에 있었다.
은서가 말을 시작한다.
"임신을했어요 선생님"
그 사내는 초봄을 닮은 얼굴에서 단 하루만에 첫눈이 꽝꽝얼어버린 한겨울처럼 차가워졌다. 어린 소녀는 사내의 혼란을 느꼈지만 애써외면했다. 자신이 가진 혼란이 더 커서. 사내의 진동은 신경써줄겨를이없었다.
사내는 은서를 피하기 시작했다. 은서는 그런 사내를 두고볼수없었다. "나쁜놈! 너는 이 뱃속아이의 아버지잖아!"
은서는 사내에게 착하게 다가가기에는 자신의 배가 점점 더 불러와서. 그와의 대화를 마무리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은서는 사내에게 자꾸 피한다면 이 아이의 아버지가 당신인걸.. 그러니까. "선생님이 여학생을 임신시켰다고 다 소문낼거에요" 그때 사내는 강하게 흔들렸다. 한발자국 떨어져서 보면 어린 여고생의 치기섞인 말투였다. 조금만 달래줘도 은서가 그런 소문을 퍼트릴일은 없었을거다. 은서는 빼어난 외모 때문에 그런 스캔들은 자신에게 더 큰 독인걸 아닌 계집이다. 근데 사내는 아주 강하게 흔들렸다. 곧 교감의 딸과 결혼을 앞뒀고, 정교사 자리까지 앞둔상태에서 이런 방해물을 두고볼수없었다. 사내는 생각했다. 나는 은서를 진심으로 사랑했고 임신했다는 소식에도 나는 대처법을 강구했어_사실 사내는 전혀하지않았다. 그저 한겨울에 내쫓긴 노비처럼 벌벌 떨었을뿐_ 그럼에도 너는 나를 극한으로 몰려고 선을 넘었어.
사내는 은서와 자신의 스캔들만을 해결할 생각이었다. 그것은 진짜다. 그래서 그는 괴로운것이다.
그는 아주 찌질하고 아주 볼품없는 악인이기 때문이다.
사내는 일단 흥분을 가라앉히고 은서를 차에 태운다. 은서는 오랜만에 사내와있는게 즐거운 모양이다. 이제 자신을 피하지않는다는 생각에 그런것같다.
사내는 은서에게 아이를 지우라고했다. 은서는 이때부터 떼를 쓰기 시작했다. 결혼할 여자와는 아이가 없고. 나는 당신의 아이를 가졌으니 나랑 결혼해야 한다는게 은서의 논리다. 사내는 어딘지도 모르는 까마득한 국도 끝자락에 은서를 버렸다.
은서는 울며 뛰쳐왔다.
비가 내리기 시작했고. 사내는 내려서 은서에게 우산하나를 주었다. "오늘 장인어른하고 내 미래 아내를 만나는 중요한 약속이있어. 널 생각하기엔 내 상황이 너무 힘들어. 이해해줘. 비가 오니까 우산은 쓰고가"
사내는 이런식이다. 극도로 더럽고 추접스러운 방법으로 자신이 인간다움을 실천한다.
사내의 차가 멀어질때 은서는 구토하기시작했다. 자신의 뱃속에있는 그의 씨로 만들어진 이 생명체가 극도로 불결했기 때문이다.
사내는 마음 한켠에 큰 바위를 올린채로 결혼준비를 계속해갔다.
아 지금 나는 늙은 사내의 귀에 대고 이 괴로운 이야기를 크게 떠들고있는중이다. 사내는 괴로운지 어떻게든 나를 떼어내려했다. 엄청난 몸싸움이 시작됐다. 나는 아랑곳하지않고 그에 귀에대고 계속해서 은서의 이야기를했다. 사내가 힘들어하는만큼 나도 힘들었다. 엄청난 육탄전을 벌였기 때문이겠지. 사내가 쓰러지자 나도 쓰러졌다. 얼굴엔 피가 흐르기 시작했다. 천천히 일어나서 얼굴의 상처를 들여다봤다.
처참한 사내의 얼굴을하고있었다.
은서는 그날밤 집에 찾아왔다. 나는 내 친절에 은서가 다시 들러붙는게 아닌가싶어서 조금은 귀찮았다. 근데 은서는 나에게 우산을 던지며 말했다. "이 괴물같은 아이는 지울거에요. 당신의 끔찍한 핏줄이 이 뱃속에서 숨쉬고 자라나는게 끔찍해요. "
나는 일단 안도했다. 아이를 지워준다는건 좋은 신호니까. 나는 그 비용을 다 전액 부담하려했다. 은서를 케어하려했다. 그때 은서의 말이 다시 날아와 꽂혔다.
"내일 학교에서 봬요. 내 입을 막을수있다면 막는게 좋을거에요"
나는 그날밤 극도로 불안해지기시작했다. 나는 왜 엄청난 시한폭탄을 앞에두고 거만을 떨었던걸까? 은서는 무서운여자였다. 어리고 착하고 내 품에서 웃기만해서 은서를 얕본것같다. 나는 그날밤 은서의 말대로 은서의 입을 막을 궁리를했다.
나는 은서와 관계하며 찍은 은서의 은밀한 사진들을 인화했다. 사진 속 은서는 더할나위없이 싱그럽고 예뻤다. 자신이 사랑하는 남자에게 모든걸 주겠다는 그 순수한 얼굴은 내가 사랑했던 은서가 맞았다. 근데 그 은서는 없다. 이제 표독스러움만 남은 괴물같았다. 나는 은서의 신체가 적나라하게 드러나고. 옷을 벗은채로 웃고 야시시한 표정을짓는 은서의 사진들을 교내에 뿌렸다.
은서는 정말 입을열지못했다.
그리고 영원한 비밀로 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