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 죽거든 술독아래 묻어줘 술독이 셀지도 모르쟎아?! >
코로나 거리 두기가 연장되며 회사가 문을 닫은지 4주가 다 되어 간다.
오늘은 개인 업무를 위해 회사에 잠시 나갔다가 일찍 퇴근했다. 점심을 먹으며 마시다 남은 소주 반병을 꺼냈다. 여느 때와 똑같이 반주를 한잔하며 식사를 하는데 아들이 물었다.
< 아빠 술은 왜 먹는 거야? >
< 인생을 아는 사람들만 마시는 거야~ >
< 그럼 다른 사람들은 못 마시는 건가? 안 마시는 건가? >
< 술은 아무나 선택할 수 있는 게 아니야! >
잠깐 사이에 주고받은 대화였다. 깊게 생각하지 않았다. 아들의 질문에 나는 한치 망설임도 없이 즉흥적으로 대답했다.
식사가 끝난 아들은 먼저 일어나겠다며 방으로 갔지만 나는 홀로 앉아 생각에 잠겼다.
< 인생을 아는 사람들만 마신다… 못 마시는 건가? 안 마시는 건가?... 술은 아무나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
내가 한 말이지만 묘~하게 설득력이 있었다.
소주는 혀끝으로만 마시면 맛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쓴맛이다. 곧 가슴으로 마셔야 한다. 술의 맛을 알고 마신다는 것은 인생의 희로애락을 알지 못하면 접할 수 없는 것이다. 희로애락의 표현이자 그것을 컨트롤할 수 있는 소통의 주파수 같은 것이다. 기쁜 날은 더욱 기쁘게 하고 슬픈 날에는 나를 달래준다. 즐거운 날에 더욱 흥을 돋우어 주는 것은 당연하다. 개인적으로 한 가지는 꼭 지키는 편인데 나는 화가 나는 날에는 술을 마시지 않는다. 화가 날 때 당장 술을 마시지는 않지만 그 또한 지나간 후에 술잔 앞에서 나의 감정을 돌아보고 반성하기도 한다. 결국 인생의 모세혈관까지 섬세하게 느끼지 않으면 술이라는 것과 하나가 될 수 없다.
인생에서 맛있는 것을 먹는 행복을 뺄 수는 없을 것이다. 맛있는 것을 더욱 맛있게 해주는 것도 술이니 술을 알면 인생의 반은 분명 행복할 것이라는 결론에 도달한다.
이래저래 애주가에겐 더없이 좋은 친구인 것이다.
< 못 마시는 건가? 안 마시는 건가? >라는 질문에 나는
< 술은 아무나 선택 할 수 있는 것이 아니야!>라고 답했다.
못 하는 것과 안 하는 것에는 분명한 차이가 있다. 해낼 수 있는 능력이 애초에 없는 것과 능력이 있지만 자제하는 것이 다르다. 그러니 술을 마시던 안 마시던 스스로 선택 할 수 있다는 것은 술을 못 마시는 사람들이 할 수 있는 선택이 아니다. 그들의 선택은 그저 술을 마시지 못하는 것 한 가지뿐이다. 음주를 결정할 수 있는 사람은 술을 마실 줄 아는 사람이며 그것을 절제할 수 있는 사람이라야 가능하게 된다. 마시고 싶어도 못 마시는 사람이 있고 마실 수는 있지만 삼키는 것뿐 진정 술의 맛을 안다고 할 수는 없다.
우리가 <시>를 소리 내어 읽었다고 해서 그 <시>를 모두 이해했다고 말하지 못하는 것과 같다. 음식은 삼키는 것만으로 소기의 목표를 이룰 수 있겠지만 술을 전혀 그렇지 않다. 삼켜서 넘겨지는 술은 죽은 술이다. 마셔도 의미 없는 술이다. 가치가 없다.
그러니 술을 선택한다는 것은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술을 받아들일 수 있는 육체를 가지고 태어나야 하고 그렇지 않다면 부단히 노력해야 한다. 그마저 몸에서 받아주지 않아 평생 술이 주는 행복을 모르는 사람들도 있다. 그들은 술이 아닌 다른 행복의 맛을 알고 살아가겠지만 애주가의 눈으로 보기엔 참으로 아쉽다.
< 다툼, 눈물, 독백, 웃음, 만남, 고백, 감동 >은 술이 주는 일상의 선물들이다.
누구나 겪을 수 있는 상태와 감정들이라 유난스러울 것도 없지만 꼭 그렇지도 않다.
이미 남들보다 유난히 예민한 감성으로 시도 때도 없이 젖은 가슴이 되어버리지만 술로 인해 이 소소한 일상들을 더욱 섬세하게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글을 쓰는 작가로서 어떠한 감정을 섬세하게 느낄 수 있다는 것은 축복이라 생각한다. 실제로 늦은 밤에 홀로 드는 반주는 내게 많은 글감을 주고 있다. 이는 바로 메모해 두었다가 글을 쓰는 재료로 쓰기에 충분하다.
자주 만나는 지인들에게는 우스갯소리로 하는 이야기가 있다.
< 죽을 때까지 술 마실 거야! >
건강한 컨디션을 유지하면서 술을 곁들인 성숙한 삶으로 살아가는 것이 언제나 내가 갖은 숙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