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술 : 나를 돌아보는 시간
일기, 영화, 책, 여행, 때로는 누군가와의 치열한 다툼이 끝난 허전한 저녁일 수도 있다. 현실의 웅장한 힘 앞에서 꼼짝도 하지 못하고 멱살을 내주어야 했던 날이면 누구나 떠오르는 생각이 있다!
< 나는 누구인가! >
< 나는 무엇이길래 이곳에 있고 그 치욕스러운 하루를 버텨내고, 힘겨움을 지고도 꿈을 꾸려 바둥대는가! >
힘든 일을 이겨내고 버텨내야 할 시간이 길어질 때 인간의 생각은 성숙한다. 키가 자라나는 애송이 같은 성장통은 비할 것이 아니다. 다소 거창할 수도 있지만 철학적 생각은 소리 옆이 내 고뇌의 옆에 앉아서 나를 지켜본다.
나는 혼자만의 시간을 즐기는 편이다. 글을 쓰고 낚시를 하고 음악을 들으며 멍하니 있기도 한다.
생산적인 많은 시간보다도 좋아하는 것은 혼자 앉아서 술을 마시는 것이다. 외로움은 내게 매력적인 카타르시스를 선물한다. 그 시간만큼 나의 육체와 정신이 자유로울 때는 없다. 그리고 철학을 가장하고 소리 없이 찾아오는 번뇌들과 마주한다. 무속인들이 자신의 신을 기다리는 의식을 하듯 나는 나의 자유로운 생각들이 나를 찾아오도록 술을 한잔 따르고 그 앞에 가만히 앉아 준비를 한다. 그 시간은 언제나 설렌다.
대부분은 늦은 퇴근 후 집에서 마신다. 때로는 퇴근길 집 앞 국밥집이나 치킨집을 들릴 때도 있다. 그런 날은 대부분 월급날이거나 평소보다 감정의 어수선한 바람을 잡지 못할 때다. 그럴 땐 분위기를 바꿔 밖에서 가볍게 마시고 들어간다.
영화에서처럼 분위기 있는 바(Bar)에 앉아서 마시고 싶은 욕심도 있다. 멋진 슈트를 입고 기다란 한쪽 다리를 늘어뜨리고 앉는다. 팔꿈치를 테이블에 기대고 손목으로만 위스키잔의 얼음을 빙글빙글 돌린다. 초점 없이 한곳을 응시하며 생각에 빠진다. 생각의 실마리를 보일 듯했을 때 입술이 젖을 만큼만 위스키를 허락한다. 상냥한 바텐더는 과하지 않은 웃음을 보이며 나의 공간에 잠시 등장한다. 여자만 보면 어떻게 해보려는 저속한 입담의 중년이 아니므로 젠틀하게 몇 마디만 섞고 내 술잔을 바라본다. 젊은 아가씨 앞에서도 나를 컨트롤할 수 있다는 자만심이 나의 가치를 끌어올려 주는 착각을 일으킨다. 바(Bar)의 어두운 조명과 음악을 충분히 느꼈으면 술을 Keep 해두고 리듬 있는 구둣발 소리를 내며 빠져나간다. 해결된 것은 아무것도 없다. 단지 나의 기분을 위로했을 뿐이다.
현실은... 일단 그런 술값에 쓸 돈은 없다. 잠깐의 기분을 달래려 비싼 술값을 지불할 만한 가치를 느끼지는 않는다. 나는 고수이므로 소주 한 병이면 언제 어디서든 생각을 정리하고 기분을 위로할 수 있다. 고수만이 해낼 수 있는 능력이다. 고로 나는 나의 기분을 달래려 비싼 술을 마시지는 않는다. 바(Bar)에 앉아 술잔을 든 남자의 실루엣을 흉내 내보고 싶을 때 잠시 상상만 해본다. 그리고 나는 정장을 입고 퇴근을 하지도 않는다.
여느 때처럼 혼자 술잔을 기울이던 날이었다.
< 나는 언제까지 술을 마실 수 있을까? > 욕심 같아선 죽기 전 침대에 누워서까지 소주를 담은 링거를 메달아놓고 싶지만 아무래도 그럴 수는 없을 것 같다. 생각은 어떻게든 죽기 전까지 술을 마시는 방법을 찾는 것으로 흘러갔다.
스스로를 돌아봤다. 처음 술을 시작한 시기, 술을 마신 주기, 금주를 했던 시기(20년 중 고작 군 시절 26개월 뿐이다) 1회 음주량, 그리고 해마다 내가 느꼈던 육체적 컨디션들의 기억을 더듬어봤다. 그리고 지금! 중년이라고 하는 나이에 들어선 나의 컨디션이 어떤지 돌아보는 순간! 허리가 뻐근하고 양반다리를 하고 앉아있던 다리의 유연함이 떨어졌음을 이내 알아차렸다. 아무 이유 없이 어깨가 시리고 뛰기 싫어진 건 이미 오래전 일이 되어버렸다. 마냥 날아다닐 것 같던 청춘은 시간을 먹고 녹이 쓸었다. 씁쓸해졌지만 인정하는 사람이 멋있는 사람이니 인정하기로 했다.
< 그렇다면 방법은 무엇 있을까? > 그렇게 생각이 끝난 다음부터 나는 실천에 옮겼다.
매일 마시던 소주 한 병을 마시지 않기로 했다. 평일 퇴근 후에 술 생각이 나면 막걸리 딱! 한 잔으로 끝낸다. 기분에 따라 평일에도 소주 한 병정도는 허락하기로 했다. 주말엔 소주를 마시지만 평일에 못 마신 양을 모조리 마실 요량으로 팔을 걷어붙이고 덤비지는 않는다. 오히려 살짝 아쉬울 때 잔을 마무리한다.
그리고 운동을 시작했다. 아침에 요가를 시작했다가 이제는 애니멀플로우라는 동작도 함께 한다. 역시 독학이다. 한 달 정도 되었는데 뱃살이 많이 줄었고 몸도 가벼워진 것 같다. 몸이 가벼워졌다는 것은 체지방이 줄고 근육량이 늘었다는 주관적인 근거이다. 근육운동을 많이 하지 않았고 근육이 성장할 충분한 시간은 아니었기 때문에 근육보다는 체지방이 약간 줄었을 것 같다.
예전에 지하철을 보면 이런 표어가 있었다.
< 하고 싶은 것이 있어서 하지 않는 것이 있다 > 금연 표어였다.
나도 하고 싶은 것이 있어서 술을 줄이려 한다. 앞으로도 술과 함께 느끼고 싶은 것들이 많다. 좋은 경치, 좋은 사람들과의 대화, 혼자만의 사색. 나는 오랜 시간 동안 술과 함께 이런 행복을 느껴야만 한다.
노년에 개량한복을 입고 대청마루에 꼿꼿하게 앉아 지인들과 술잔을 드는 상상을 해본다.
여기서 중요한것은 < 꼿꼿하게 앉아서! > 마신다는 것이다. 나는 그렇게 할 것이다.